왜 어릴 때를 기억 못 할까?
우리는 왜 3세 이전의 기억을 거의 떠올릴 수 없을까? 흔히 ‘유아기 기억상실증’은 언어 중추와 기억 중추의 미성숙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 당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기 때의 세상은 오직 실재만 있는 세상이었다. 춥더라도 ‘춥다’라는 개념은 모르고, 단지 몸이 수축하는 감각만 있었다. 배고플 때도 ‘배고픔’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위장이 비어 꼬르륵 소리가 나는 직접적인 감각만 알았다. 언어가 없으니 생각이나 상상, 유추, 판단이 일어나지 않았고, 개념과 관념에 빠지지 않은 채 오직 감각적 실재만을 경험했다.
이 경험은 외국에 가서 그 나라말을 전혀 모를 때와 비슷하다. 상대가 아무리 많이 말해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머릿속에서 해석이나 판단이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소리의 높낮이, 표정, 몸짓 등 직접적인 감각만 받아들일 뿐이다.
기억은 언어로 저장된다.
기억은 언어 중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어로 개념화되지 않은 순수한 감각 경험은 기억으로 고착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의 그 생생했던 실재의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부모의 가르침과 어린이집, 학교에서 말과 글로 실재를 개념화하여 세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부모, 학교, 사회는 아이에게 세상을 개념으로 설명하고, 이를 통해 아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상대와 소통한다. 이 과정에서 실재는 점점 개념에 가려지게 된다.
이는 생존과 소통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개념이 실재를 완전히 대체해 버릴 때 생긴다. 우리는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개념을 사용하며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개념이 실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결국, 어릴 때의 순수한 실재 경험은 개념과 관념의 세계로 완전히 채워지게 된다.
개념과 실재의 차이
어릴 때, 옆집 어른이 소고기 한 점을 내 밥그릇에 넣어 주었다. 모양이 전에 먹던 고기와 달랐지만, 어른이 주신 것으로 의심하지 않고 받았다. 고마움도 잠시, 입안에 넣자마자 바로 뱉었다. 사실은 된장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어른은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며 박장대소했다.
설탕인 줄 알고 음료수에 넣었는데 소금이었던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된장 덩어리와 고기, 소금과 설탕은 모양과 색깔로는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붉은 소금, 검은 소금, 곱고 거친 소금, 갈색이나 흑색 설탕도 있다. 색깔과 모양만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 정확히 알려면 모양, 형태, 이름보다 직접 맛을 보고 판단해야만 한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아파요.”라고 말할 때, 의사는 “어떻게 아픈가요?”라고 묻는다. 환자의 ‘아픔’은 실재이고, 의사의 진단명은 개념이다. 하지만 의사가 검사 수치만 보고 “정상입니다.”라고 하면 환자는 답답해한다. 수치라는 개념으로는 환자가 경험하는 실재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렇다. 첫사랑의 설렘은 실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상대방을 보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밤새 잠을 못 이루는 그 모든 감각이 실재다. 하지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나 연애 기술서의 설명은 개념이다. 아무리 많은 연애 이론을 알아도 실제 설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정작 맛은 모르고 개념만 알기에 개념이 곧 맛이라고 착각한다. 따라서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좋은 사람’, ‘별로 관계하고 싶지 않은 사람’ 등으로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대의 인상, 학력, 직업, 재산 등 개념 정보에 기반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SNS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상대의 게시물을 보며 그 사람의 삶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념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는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그 사람을 알고 실재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개념은 실재를 말, 이름, 관념, 상징 등으로 포착해 이해하려 하지만, 실재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
이름(설탕, 슈가, 糖 등), 모양(각지다, 둥글다 등), 색깔(하얗다, 황색 등)로 아는 것이 개념이고, 모양, 색깔, 이름은 모르더라도 직접 맛보아 “짜다”, “달다”고 아는 것이 실재이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의 감동은 실재이지만 작품 비평은 개념이다.
말은 대화의 한 부분이나 반복으로 기억되는 부분을 관념화하여 이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긴다. 이 과정에서 실재는 언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다. 우리는 ‘설탕’이라는 이름과 모양, 색깔로 사물을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맛과 감각이 실재이다. 그러나 말과 개념은 실재를 완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우리는 실재와 점점 멀어진 세상을 살고 있다.
실재란 무엇인가?
실재는 모양, 색깔, 이름에 있지 않고, 그 자체가 가진 성질에 있다. 무겁다, 차다, 즐겁다, 화난다 등의 직접적인 감각과 느낌, 마음의 상태가 바로 실재다.
A1 용지를 반으로 자르면 A2가 되고, 계속 나누면 A10이 된다. 더 나누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쿼크까지 이른다. 면이 선으로, 선이 점으로, 점이 에너지로 변하더라도 모양과 색깔이 있으면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더 이상 형태가 없으면 붙일 수 없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 순간이 바로 실재다.
하트 표시가 사랑일까? 사랑을 모양, 색깔, 이름으로 표시하는 것은 개념이고, 사랑은 감각과 느낌, 마음으로만 아는 것이 실재다. 호랑이 사진은 무섭거나 두렵지 않다. 사진은 개념이기에 몸과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호랑이를 마주하면 몸이 얼어붙고 식은땀이 나고 공포심이 덮친다. 호랑이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왜 어릴 때를 기억 못 할까?
우리는 왜 3세 이전의 기억을 거의 떠올릴 수 없을까? 흔히 ‘유아기 기억상실증’은 언어 중추와 기억 중추의 미성숙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 당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기 때의 세상은 오직 실재만 있는 세상이었다. 춥더라도 ‘춥다’라는 개념은 모르고, 단지 몸이 수축하는 감각만 있었다. 배고플 때도 ‘배고픔’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위장이 비어 꼬르륵 소리가 나는 직접적인 감각만 알았다. 언어가 없으니 생각이나 상상, 유추, 판단이 일어나지 않았고, 개념과 관념에 빠지지 않은 채 오직 감각적 실재만을 경험했다.
이 경험은 외국에 가서 그 나라말을 전혀 모를 때와 비슷하다. 상대가 아무리 많이 말해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머릿속에서 해석이나 판단이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소리의 높낮이, 표정, 몸짓 등 직접적인 감각만 받아들일 뿐이다.
기억은 언어로 저장된다.
기억은 언어 중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어로 개념화되지 않은 순수한 감각 경험은 기억으로 고착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의 그 생생했던 실재의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부모의 가르침과 어린이집, 학교에서 말과 글로 실재를 개념화하여 세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부모, 학교, 사회는 아이에게 세상을 개념으로 설명하고, 이를 통해 아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상대와 소통한다. 이 과정에서 실재는 점점 개념에 가려지게 된다.
이는 생존과 소통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개념이 실재를 완전히 대체해 버릴 때 생긴다. 우리는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개념을 사용하며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개념이 실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결국, 어릴 때의 순수한 실재 경험은 개념과 관념의 세계로 완전히 채워지게 된다.
개념과 실재의 차이
어릴 때, 옆집 어른이 소고기 한 점을 내 밥그릇에 넣어 주었다. 모양이 전에 먹던 고기와 달랐지만, 어른이 주신 것으로 의심하지 않고 받았다. 고마움도 잠시, 입안에 넣자마자 바로 뱉었다. 사실은 된장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어른은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며 박장대소했다.
설탕인 줄 알고 음료수에 넣었는데 소금이었던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된장 덩어리와 고기, 소금과 설탕은 모양과 색깔로는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붉은 소금, 검은 소금, 곱고 거친 소금, 갈색이나 흑색 설탕도 있다. 색깔과 모양만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 정확히 알려면 모양, 형태, 이름보다 직접 맛을 보고 판단해야만 한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아파요.”라고 말할 때, 의사는 “어떻게 아픈가요?”라고 묻는다. 환자의 ‘아픔’은 실재이고, 의사의 진단명은 개념이다. 하지만 의사가 검사 수치만 보고 “정상입니다.”라고 하면 환자는 답답해한다. 수치라는 개념으로는 환자가 경험하는 실재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렇다. 첫사랑의 설렘은 실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상대방을 보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밤새 잠을 못 이루는 그 모든 감각이 실재다. 하지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나 연애 기술서의 설명은 개념이다. 아무리 많은 연애 이론을 알아도 실제 설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정작 맛은 모르고 개념만 알기에 개념이 곧 맛이라고 착각한다. 따라서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좋은 사람’, ‘별로 관계하고 싶지 않은 사람’ 등으로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대의 인상, 학력, 직업, 재산 등 개념 정보에 기반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SNS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상대의 게시물을 보며 그 사람의 삶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념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는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그 사람을 알고 실재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개념은 실재를 말, 이름, 관념, 상징 등으로 포착해 이해하려 하지만, 실재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
이름(설탕, 슈가, 糖 등), 모양(각지다, 둥글다 등), 색깔(하얗다, 황색 등)로 아는 것이 개념이고, 모양, 색깔, 이름은 모르더라도 직접 맛보아 “짜다”, “달다”고 아는 것이 실재이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의 감동은 실재이지만 작품 비평은 개념이다.
말은 대화의 한 부분이나 반복으로 기억되는 부분을 관념화하여 이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긴다. 이 과정에서 실재는 언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다. 우리는 ‘설탕’이라는 이름과 모양, 색깔로 사물을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맛과 감각이 실재이다. 그러나 말과 개념은 실재를 완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우리는 실재와 점점 멀어진 세상을 살고 있다.
실재란 무엇인가?
실재는 모양, 색깔, 이름에 있지 않고, 그 자체가 가진 성질에 있다. 무겁다, 차다, 즐겁다, 화난다 등의 직접적인 감각과 느낌, 마음의 상태가 바로 실재다.
A1 용지를 반으로 자르면 A2가 되고, 계속 나누면 A10이 된다. 더 나누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쿼크까지 이른다. 면이 선으로, 선이 점으로, 점이 에너지로 변하더라도 모양과 색깔이 있으면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더 이상 형태가 없으면 붙일 수 없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 순간이 바로 실재다.
하트 표시가 사랑일까? 사랑을 모양, 색깔, 이름으로 표시하는 것은 개념이고, 사랑은 감각과 느낌, 마음으로만 아는 것이 실재다. 호랑이 사진은 무섭거나 두렵지 않다. 사진은 개념이기에 몸과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호랑이를 마주하면 몸이 얼어붙고 식은땀이 나고 공포심이 덮친다. 호랑이는 실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