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대 위 아이들
공항 TV 화면 속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흙장난하며 뛰어놀 나이에, 화려한 양복에 키높이 구두를 신고, 나이에 맞지 않는 율동과 표정을 흉내 낸다. 아직 순수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어른들의 무대에 올라선 그 모습은 어딘가 안쓰럽다. 더 안타까운 건, 그런 모습을 귀엽고 잘한다고 소비하며 즐거워하는 어른들이다.
물론 어린 시절 음악 활동은 집중력과 창의력, 사회성, 협동심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예술적 재능을 조기에 발견하고, 미래 진로를 탐색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방송 출연은 무대 경험과 자기 표현력, 자신감을 키우는 분명한 장점이 있으며, 여러 어른과의 접촉은 사회 소통 능력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에 따른 질문 하나. “지금 이 어린 나이에, 이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경험일까?”
어른 중심 예능 방송은 아이들에게 비교와 평가, 과도한 관심을 쏟아낸다. 이는 지나친 긴장과 스트레스로 이어져 동심을 위협하거나 자신감을 잃게 만들며, 반대로 불균형한 자만심을 키울 수도 있다.
더욱이, 성인 가요는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부적절한 언어나 감정,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를 생각 없이 모방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가치관이나 행동이 자연스럽게 내면화될 우려도 있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맑고 순수한 목소리에는 동요처럼 동심을 담은 노래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아이가 성인 가요의 복잡한 감정선이나 발성법을 억지로 흉내 내려 애쓰다 보면, 성대는 물론 신체나 정신 발달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아이가 너무 이른 시기에 상업화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알아가기도 전에 사회의 기대와 기준에 맞춰 자신을 연출하면, 건강한 자아 형성과 심리적 안정, 나아가 성숙한 사회적 책임감의 성장까지 저해할 수 있다.
또래 문화 속에서도 우려스러운 변화가 나타난다. 연예인 문화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아이들의 놀이마저 물질 중심으로 바꾸고, 외모와 소비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확산시킨다. 이는 소비지향 사고방식과 외적 기준에 의존하는 사회 풍토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성장의 본질에 대한 성찰
사람은 자기 나이에 맞는 경험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아이는 아이답게, 청소년은 청소년답게 지낼 때 비로소 어른이 되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무대 위 화려하고 이른 조명이 아이의 성장 시간을 대신할 수 없다. 성장에는 마땅한 시간과 순서가 있으며, 그 시간은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결코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 될 삶의 가장 소중한 시기다. 어른들이 이를 간과하거나 부추기며 즐긴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반려의 이름으로, 동물의 본성을 잊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호상(好喪)이라며 슬퍼하지 않았지만 9년 간 키우던 반려견이 죽자 긴 기간 불면증과 식욕을 잃는 경우를 가까이서 보았다.
오늘날 반려견과 반려묘는 단순한 애완동물을 넘어, 때로는 어려운 이웃보다 더 나은 대우와 보살핌을 받는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보호자들은 동물들에게 인간과 유사한 권리와 대우를 부여하며, ‘반려동물의 인간화’라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어린 시절 인형이나 장난감에 애착을 가졌던 경험처럼, 반려동물로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고 정서적 위안을 얻으려는 현대인의 심리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인가? 싶다.
왜곡된 애정 표현
문제는 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 자체가 아니라, 그 애정이 때로는 지나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본래 털로 덮인 몸에 옷과 양말, 머리핀, 선글라스, 꼬리 리본, 심지어 염색까지 더해진 모습을 보면, 살아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닌 인형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쯤 되면 발톱 물들이기나 문신, 코·귀걸이를 하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늙거나 병듦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려견을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동물의 본능과 신체적 필요를 외면한 일방적 행위는 아닌지 의문이 든다. 콘크리트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다 어렵게 바깥으로 나온 개는 흙냄새를 맡고 마음껏 뛰어놀고 싶다. 반려동물을 사람처럼 대할 때, 우리는 동물의 본능적 행동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이는 결국 동물의 스트레스와 행동 문제로 이어지며, 정작 ‘개나 고양이로서 살아갈 권리’를 빼앗는 셈이다.
동물의 본성을 무시하는 인간화
동물은 사람과 달리 옷 없이도 자연환경에서 생존으로 적응하며 살아왔다. 지나친 치장과 옷 입히기는 불편함과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움직임을 제한하며 통풍이 잘되지 않는 옷이나 액세서리는 여름철 열사병, 피부염, 알레르기, 심지어 건강 이상까지 초래할 수 있다.
동물을 인간의 기준에 맞춰 꾸미고 대하는 것은, 결국 그 본성을 무시하는 행위다. 이는 스트레스 증가, 행동 이상, 건강 악화로 이어질 수 있으며, 보호자 또한 진정으로 반려동물을 사랑한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적절한 수준의 관리나 애정 표현은 보호자와 반려동물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정서적 안정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반려동물의 편안함과 동물 본성’이라는 기준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보호자의 만족보다, 동물의 건강과 본성, 자유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불교 관점에서 본 존재 존중
불교는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붓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몸은 몸으로,
느낌은 느낌으로,
마음은 마음으로,
법은 법으로 알아야 한다.”
이는 “몸을 느낌이나 마음으로 알지 말라.
느낌을 마음이나 법으로 알지 말라.
마음을 법이나 몸으로 알지 말라.
법을 느낌이나 마음으로 알지 말라.
몸, 느낌, 마음, 법을 ‘나’로 알면 안 된다.”
모든 존재를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라는 가르침이다.
반려견은 반려견으로, 반려묘는 반려묘로 알아야 한다. 그들을 단순히 ‘가족’이라 부르거나, ‘나’처럼 여기며 자신의 욕구를 쏟는 것은 심하게는 학대다.
진정한 애정의 의미
반려동물은 장난감, 인형이 아니다. 반려동물로 존중받아야 한다. 진정한 애정과 배려는 동물을 사람처럼 대하는 데서가 아니며. 자신의 외로움이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반려동물을 ‘나’처럼 또는 ‘가족’처럼 여기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동물을 동물 그 자체로 이해하고, 그들이 가진 생명과 동물 본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반려동물이 그들의 세상(땅)에서 존중받았으면 한다.
살고 있으니 이럴 줄 알았다.


법당 위 오월 보름달

1. 무대 위 아이들
공항 TV 화면 속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흙장난하며 뛰어놀 나이에, 화려한 양복에 키높이 구두를 신고, 나이에 맞지 않는 율동과 표정을 흉내 낸다. 아직 순수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어른들의 무대에 올라선 그 모습은 어딘가 안쓰럽다. 더 안타까운 건, 그런 모습을 귀엽고 잘한다고 소비하며 즐거워하는 어른들이다.
물론 어린 시절 음악 활동은 집중력과 창의력, 사회성, 협동심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예술적 재능을 조기에 발견하고, 미래 진로를 탐색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방송 출연은 무대 경험과 자기 표현력, 자신감을 키우는 분명한 장점이 있으며, 여러 어른과의 접촉은 사회 소통 능력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에 따른 질문 하나. “지금 이 어린 나이에, 이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경험일까?”
어른 중심 예능 방송은 아이들에게 비교와 평가, 과도한 관심을 쏟아낸다. 이는 지나친 긴장과 스트레스로 이어져 동심을 위협하거나 자신감을 잃게 만들며, 반대로 불균형한 자만심을 키울 수도 있다.
더욱이, 성인 가요는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부적절한 언어나 감정,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를 생각 없이 모방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가치관이나 행동이 자연스럽게 내면화될 우려도 있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맑고 순수한 목소리에는 동요처럼 동심을 담은 노래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아이가 성인 가요의 복잡한 감정선이나 발성법을 억지로 흉내 내려 애쓰다 보면, 성대는 물론 신체나 정신 발달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아이가 너무 이른 시기에 상업화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알아가기도 전에 사회의 기대와 기준에 맞춰 자신을 연출하면, 건강한 자아 형성과 심리적 안정, 나아가 성숙한 사회적 책임감의 성장까지 저해할 수 있다.
또래 문화 속에서도 우려스러운 변화가 나타난다. 연예인 문화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아이들의 놀이마저 물질 중심으로 바꾸고, 외모와 소비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확산시킨다. 이는 소비지향 사고방식과 외적 기준에 의존하는 사회 풍토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성장의 본질에 대한 성찰
사람은 자기 나이에 맞는 경험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아이는 아이답게, 청소년은 청소년답게 지낼 때 비로소 어른이 되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무대 위 화려하고 이른 조명이 아이의 성장 시간을 대신할 수 없다. 성장에는 마땅한 시간과 순서가 있으며, 그 시간은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결코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 될 삶의 가장 소중한 시기다. 어른들이 이를 간과하거나 부추기며 즐긴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반려의 이름으로, 동물의 본성을 잊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호상(好喪)이라며 슬퍼하지 않았지만 9년 간 키우던 반려견이 죽자 긴 기간 불면증과 식욕을 잃는 경우를 가까이서 보았다.
오늘날 반려견과 반려묘는 단순한 애완동물을 넘어, 때로는 어려운 이웃보다 더 나은 대우와 보살핌을 받는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보호자들은 동물들에게 인간과 유사한 권리와 대우를 부여하며, ‘반려동물의 인간화’라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어린 시절 인형이나 장난감에 애착을 가졌던 경험처럼, 반려동물로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고 정서적 위안을 얻으려는 현대인의 심리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인가? 싶다.
왜곡된 애정 표현
문제는 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 자체가 아니라, 그 애정이 때로는 지나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본래 털로 덮인 몸에 옷과 양말, 머리핀, 선글라스, 꼬리 리본, 심지어 염색까지 더해진 모습을 보면, 살아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닌 인형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쯤 되면 발톱 물들이기나 문신, 코·귀걸이를 하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늙거나 병듦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려견을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동물의 본능과 신체적 필요를 외면한 일방적 행위는 아닌지 의문이 든다. 콘크리트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다 어렵게 바깥으로 나온 개는 흙냄새를 맡고 마음껏 뛰어놀고 싶다. 반려동물을 사람처럼 대할 때, 우리는 동물의 본능적 행동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이는 결국 동물의 스트레스와 행동 문제로 이어지며, 정작 ‘개나 고양이로서 살아갈 권리’를 빼앗는 셈이다.
동물의 본성을 무시하는 인간화
동물은 사람과 달리 옷 없이도 자연환경에서 생존으로 적응하며 살아왔다. 지나친 치장과 옷 입히기는 불편함과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움직임을 제한하며 통풍이 잘되지 않는 옷이나 액세서리는 여름철 열사병, 피부염, 알레르기, 심지어 건강 이상까지 초래할 수 있다.
동물을 인간의 기준에 맞춰 꾸미고 대하는 것은, 결국 그 본성을 무시하는 행위다. 이는 스트레스 증가, 행동 이상, 건강 악화로 이어질 수 있으며, 보호자 또한 진정으로 반려동물을 사랑한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적절한 수준의 관리나 애정 표현은 보호자와 반려동물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정서적 안정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반려동물의 편안함과 동물 본성’이라는 기준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보호자의 만족보다, 동물의 건강과 본성, 자유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불교 관점에서 본 존재 존중
불교는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붓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몸은 몸으로,
느낌은 느낌으로,
마음은 마음으로,
법은 법으로 알아야 한다.”
이는 “몸을 느낌이나 마음으로 알지 말라.
느낌을 마음이나 법으로 알지 말라.
마음을 법이나 몸으로 알지 말라.
법을 느낌이나 마음으로 알지 말라.
몸, 느낌, 마음, 법을 ‘나’로 알면 안 된다.”
모든 존재를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라는 가르침이다.
반려견은 반려견으로, 반려묘는 반려묘로 알아야 한다. 그들을 단순히 ‘가족’이라 부르거나, ‘나’처럼 여기며 자신의 욕구를 쏟는 것은 심하게는 학대다.
진정한 애정의 의미
반려동물은 장난감, 인형이 아니다. 반려동물로 존중받아야 한다. 진정한 애정과 배려는 동물을 사람처럼 대하는 데서가 아니며. 자신의 외로움이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반려동물을 ‘나’처럼 또는 ‘가족’처럼 여기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동물을 동물 그 자체로 이해하고, 그들이 가진 생명과 동물 본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반려동물이 그들의 세상(땅)에서 존중받았으면 한다.
살고 있으니 이럴 줄 알았다.
법당 위 오월 보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