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를 보는 저마다의 다른 눈 / ‘상대성’과 ‘본질’
사람 수만큼 세상이 존재하고, 의견이 사람 수만큼 쏟아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같은 자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달을 보라 하면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친 채, “내 손가락이 더 정확하다.”고 다투는 모습이다. 우리는 본질보다 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먼저 본다.
산에 사는 이는 해가 산 너머로 진다고 말하고,
도시에 사는 이는 빌딩 사이로 해가 사라진다고 말하며,
바다에 사는 이는 수평선 아래로 해가 잠긴다고 말한다.
모두 틀리지 않았다. 다만, 서 있는 판단의 시선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강원도 사람에게 바다의 넓이와 깊이를 설명하는 일은 끝이 없고,
도시 사람에게 산의 침묵과 적막함을 전하는 일은 영 답답하다.
눈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쪽 나라 사람에게 눈의 차가움과 결정의 아름다움을 말로 전하려 할 때, 우리는 언어의 벽 앞에서 멈춰 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섬사람에게 빌딩의 기준을 들이대고, 산 사람에게 바다의 문법을 강요한다. 판단의 출발점과 관점이 다름을 잊은 채,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럴수록 말은 많아지고, 소리는 거칠고 이해의 틈은 메워지지 않은 채 더 벌어진다.
종교도, 식습관도, 옷차림도, 삶의 방식도 그렇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니, 상황이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나의 사물을 보고도 서로 다른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답은 없는 걸까?
있다. 생각보다 단순하다.
해가 앞산으로 지든,
빌딩 너머로 지든,
푸른 바다 아래로 가라앉든 말든.
결국 해는 진다.
‘어디로 지는가?’라는 현상이 아니라 ‘진다’는 사실, 그 본질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현상을 붙들고 말다툼하면 주장, 설득, 강요가 끼어들지만, 본질을 바라보면 다툴 자리가 없다.
모습은 수천 가지로 달라도 본질은 오직 하나. 내 시선이 머물던 껍데기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이토록 소란스러운 세상을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지켜보려는 단 하나의 이유다.

노니는 꿩


지는 해를 보는 저마다의 다른 눈 / ‘상대성’과 ‘본질’
사람 수만큼 세상이 존재하고, 의견이 사람 수만큼 쏟아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같은 자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달을 보라 하면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친 채, “내 손가락이 더 정확하다.”고 다투는 모습이다. 우리는 본질보다 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먼저 본다.
산에 사는 이는 해가 산 너머로 진다고 말하고,
도시에 사는 이는 빌딩 사이로 해가 사라진다고 말하며,
바다에 사는 이는 수평선 아래로 해가 잠긴다고 말한다.
모두 틀리지 않았다. 다만, 서 있는 판단의 시선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강원도 사람에게 바다의 넓이와 깊이를 설명하는 일은 끝이 없고,
도시 사람에게 산의 침묵과 적막함을 전하는 일은 영 답답하다.
눈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쪽 나라 사람에게 눈의 차가움과 결정의 아름다움을 말로 전하려 할 때, 우리는 언어의 벽 앞에서 멈춰 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섬사람에게 빌딩의 기준을 들이대고, 산 사람에게 바다의 문법을 강요한다. 판단의 출발점과 관점이 다름을 잊은 채,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럴수록 말은 많아지고, 소리는 거칠고 이해의 틈은 메워지지 않은 채 더 벌어진다.
종교도, 식습관도, 옷차림도, 삶의 방식도 그렇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니, 상황이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나의 사물을 보고도 서로 다른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답은 없는 걸까?
있다. 생각보다 단순하다.
해가 앞산으로 지든,
빌딩 너머로 지든,
푸른 바다 아래로 가라앉든 말든.
결국 해는 진다.
‘어디로 지는가?’라는 현상이 아니라 ‘진다’는 사실, 그 본질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현상을 붙들고 말다툼하면 주장, 설득, 강요가 끼어들지만, 본질을 바라보면 다툴 자리가 없다.
모습은 수천 가지로 달라도 본질은 오직 하나. 내 시선이 머물던 껍데기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이토록 소란스러운 세상을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지켜보려는 단 하나의 이유다.
노니는 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