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성을 다해도 만족을 모르는 혀와 위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오며 나는 위와 혀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런 위는 네 시간도 안 되어 다시 허기진다고 소리친다. 혀는 또 다른 자극을 찾아 나선다. 그 앞에서 나는 허탈하고 한심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이 둘은 원수다.
배는 고픈데 혀는 맛이 없다며 투정을 부리고, 배는 더는 들어갈 수 없다며 괴로워하는데도 혀는 디저트를 찾고 커피로 갈무리하자며 성화다. 위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곧 “배고파”라는 투정이 시작된다. 매 끼니 정성을 다했건만, 지나고 나면 무엇을 먹었는지도 잊는다. 감동도, 감사도 없다. 알아주지 않는데, 왜 정성을 쏟을까. 돌아오는 건 투정과 불만, 병듦과 노쇠함뿐이다. 갈수록 버르장머리 없고, 염치도 없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공든 탑이 무너진 듯 허탈하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불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2. 무뎌진 감각, 사라진 의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허전함은 단순히 위장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들을 무감각하게 사용해 온 탓일지도 모른다. 혀와 위는 그저 생리적 기관일 뿐인데도 나는 왜 이들에게 서운하고 실망할까? 어쩌면 잘못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무감각하게 사용해 온 나에게 있는 건 아닐까. 언제부턴가 먹는 일에서 의미를 잃었다.
식사는 생존의 기본이다. 하지만 어느새 세 끼는 기계처럼 반복된다. 맛은 무채색 배경처럼 아무 감흥이 없다.
맛집을 찾아가도, 새 요리를 마주해도 감탄은 짧고 감동은 없다. 맛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던 기억은 아득하다. 감탄은커녕 어떤 음식을 입에 넣어도, 그것이 감각의 언어로 해석되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3. 혀와 위의 정신연령은 겨우 돌
혀와 위를 들여다보니, 정신연령이 갓난아기 수준이다. 기다리라는 말에 짜증 내고, 과자 하나면 조용해진다. 이런 미숙아를 수십 년간 믿고 함께해왔다니,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이제는 이 혀와 위가 못마땅해졌다. 오랫동안 포식에 길들어 버릇없어졌고, 무엇을 먹었는지 곧 잊어버리기 일쑤며 매사에 아무 감동도 받지 못한 채 축 늘어진 위장으로 배를 가리는 옷을 입은 지 얼마나 오래되었나, 호강에 겨워 흐트러지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감흥이 무뎌져 버린 혀와 위.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4. 끝없는 욕구와 공허한 반복
“또 배고프다.”
위는 어김없이 신호를 보낸다. 조금 전 기름지고 풍성한 식탁 앞에서 포만감에 위장이 축 늘어졌건만, 네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배고프다고 아우성친다. 혀는 그 틈을 타 새롭고, 더 자극적이며, 더 감미로운 무언가를 갈구한다. “이번엔 뭐가 들어오나 보자.” 혀는 늘 호기심에 차 있다.
나는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맛집을 검색하고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문득 허탈감이 밀려온다. 아무리 많이 먹여도,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어도 만족은 잠깐뿐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작년에도, 지난달에도 알았건만, 또다시 그들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손에 먹을 것을 잔뜩 잡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그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5. 감각의 허기, 마음의 피로
그들은 잠시 포만감에 젖을 뿐, 곧 허기와 식탐으로 깨어난다. 이쯤 되면 나는 묻고 싶어진다. “도대체 너희는 언제 만족할 거니? 언제쯤이면 진짜로 충만함으로 먹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그저 먹고, 채우고, 잊었다. 혀는 나태해졌고, 위는 피곤해졌다. 매일 과잉이었다. 배불리 먹어도 허줄하다. 배고픔이 아니라 감각의 허기다. 포만감은 있었지만, 만족은 없다. 이처럼 내 몸은 감각의 사치 속에서 오랜 레코드판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더 무뎌졌고, 정신은 그 빈 껍데기를 이끌고 나른히 떠돌 뿐이다.
6. 그들은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
이 끝없는 욕구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 과식과 자극의 반복:
충분한 휴식 없이 위장에 음식을 쏟아부은 결과, 감각은 자극에 둔감해졌고 더 강한 자극만을 원하게 되었다.
▶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
몸은 회복할 시간을 갖지 못했고, 피로는 누적되었다. 혀는 예민해지고 위장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다 보니 더욱 악화한다.
▶ 자극 중심의 식사:
맛이 아닌 (반찬의) 강한 자극만을 좇다 보니, 혀와 위는 점점 ‘귀한 줄 모르는’ 불평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안다. 더는 위와 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다. 멈추고, 비우고, 쉬겠다. 그게 식탐에서 벗어나 진짜 건강을 되찾는 길임을.
7. 포식이 아닌 절제로 향하기
아무리 많이 먹여도 다시 식탐을 드러내는 이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다른 길을 택하려 한다. 공복의 시간은 장기에 휴식을 주고, 내 몸은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정화하며 세포는 자가포식이라는 놀라운 과정을 통해 새로움을 준비한다.
위와 혀에게 말한다. “잠시만 쉬자. 오늘은 여덟 시간만, 아니 하루 한 끼만 먹고 쉬어보자. 너희에게 진짜 휴식을 선물할게.” 처음에는 투정한다. “배고파, 기운 없어, 영양실조야.”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위와 혀는 오히려 더 섬세해지고, 작은 음식 한 점에도 만족과 포만감이 있다.
8. 혀와 위를 위한 최고의 보상, 이렇게 시작해 보자
결국, 혀와 위의 끝없는 요구에 무조건 응하는 것은 오히려 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할 뿐이다. 진정한 만족과 건강을 위해서는 욕구를 절제하고 감각을 회복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① 식탁에 앉아 눈을 감고 현재 마음 상태를 살핀다. 성급한 식탐이 올라올 경우, 호흡을 주시하여 잠시 그 마음을 가라앉힌다.
② 식욕이 가라앉을 때, 조용히 수저를 든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③ 씹는 동안엔 눈을 감고, 입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살핀다.
- 혀의 움직임, 침의 흐름, 씹는 리듬을 주시한다.
④ 입안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스스로 적절한 양을 먹게 된다. 이때엔 혀와 위는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왜일까? 혀는 반찬(음식)을 모른다. 김치도, 불고기도 구분 못 한다. 그저 맵고 짜고 뜨거운 자극만을 알 뿐이다.


1. 정성을 다해도 만족을 모르는 혀와 위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오며 나는 위와 혀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런 위는 네 시간도 안 되어 다시 허기진다고 소리친다. 혀는 또 다른 자극을 찾아 나선다. 그 앞에서 나는 허탈하고 한심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이 둘은 원수다.
배는 고픈데 혀는 맛이 없다며 투정을 부리고, 배는 더는 들어갈 수 없다며 괴로워하는데도 혀는 디저트를 찾고 커피로 갈무리하자며 성화다. 위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곧 “배고파”라는 투정이 시작된다. 매 끼니 정성을 다했건만, 지나고 나면 무엇을 먹었는지도 잊는다. 감동도, 감사도 없다. 알아주지 않는데, 왜 정성을 쏟을까. 돌아오는 건 투정과 불만, 병듦과 노쇠함뿐이다. 갈수록 버르장머리 없고, 염치도 없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공든 탑이 무너진 듯 허탈하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불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2. 무뎌진 감각, 사라진 의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허전함은 단순히 위장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들을 무감각하게 사용해 온 탓일지도 모른다. 혀와 위는 그저 생리적 기관일 뿐인데도 나는 왜 이들에게 서운하고 실망할까? 어쩌면 잘못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무감각하게 사용해 온 나에게 있는 건 아닐까. 언제부턴가 먹는 일에서 의미를 잃었다.
식사는 생존의 기본이다. 하지만 어느새 세 끼는 기계처럼 반복된다. 맛은 무채색 배경처럼 아무 감흥이 없다.
맛집을 찾아가도, 새 요리를 마주해도 감탄은 짧고 감동은 없다. 맛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던 기억은 아득하다. 감탄은커녕 어떤 음식을 입에 넣어도, 그것이 감각의 언어로 해석되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3. 혀와 위의 정신연령은 겨우 돌
혀와 위를 들여다보니, 정신연령이 갓난아기 수준이다. 기다리라는 말에 짜증 내고, 과자 하나면 조용해진다. 이런 미숙아를 수십 년간 믿고 함께해왔다니,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이제는 이 혀와 위가 못마땅해졌다. 오랫동안 포식에 길들어 버릇없어졌고, 무엇을 먹었는지 곧 잊어버리기 일쑤며 매사에 아무 감동도 받지 못한 채 축 늘어진 위장으로 배를 가리는 옷을 입은 지 얼마나 오래되었나, 호강에 겨워 흐트러지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감흥이 무뎌져 버린 혀와 위.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4. 끝없는 욕구와 공허한 반복
“또 배고프다.”
위는 어김없이 신호를 보낸다. 조금 전 기름지고 풍성한 식탁 앞에서 포만감에 위장이 축 늘어졌건만, 네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배고프다고 아우성친다. 혀는 그 틈을 타 새롭고, 더 자극적이며, 더 감미로운 무언가를 갈구한다. “이번엔 뭐가 들어오나 보자.” 혀는 늘 호기심에 차 있다.
나는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맛집을 검색하고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문득 허탈감이 밀려온다. 아무리 많이 먹여도,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어도 만족은 잠깐뿐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작년에도, 지난달에도 알았건만, 또다시 그들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손에 먹을 것을 잔뜩 잡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그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5. 감각의 허기, 마음의 피로
그들은 잠시 포만감에 젖을 뿐, 곧 허기와 식탐으로 깨어난다. 이쯤 되면 나는 묻고 싶어진다. “도대체 너희는 언제 만족할 거니? 언제쯤이면 진짜로 충만함으로 먹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그저 먹고, 채우고, 잊었다. 혀는 나태해졌고, 위는 피곤해졌다. 매일 과잉이었다. 배불리 먹어도 허줄하다. 배고픔이 아니라 감각의 허기다. 포만감은 있었지만, 만족은 없다. 이처럼 내 몸은 감각의 사치 속에서 오랜 레코드판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더 무뎌졌고, 정신은 그 빈 껍데기를 이끌고 나른히 떠돌 뿐이다.
6. 그들은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
이 끝없는 욕구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 과식과 자극의 반복:
충분한 휴식 없이 위장에 음식을 쏟아부은 결과, 감각은 자극에 둔감해졌고 더 강한 자극만을 원하게 되었다.
▶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
몸은 회복할 시간을 갖지 못했고, 피로는 누적되었다. 혀는 예민해지고 위장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다 보니 더욱 악화한다.
▶ 자극 중심의 식사:
맛이 아닌 (반찬의) 강한 자극만을 좇다 보니, 혀와 위는 점점 ‘귀한 줄 모르는’ 불평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안다. 더는 위와 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다. 멈추고, 비우고, 쉬겠다. 그게 식탐에서 벗어나 진짜 건강을 되찾는 길임을.
7. 포식이 아닌 절제로 향하기
아무리 많이 먹여도 다시 식탐을 드러내는 이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다른 길을 택하려 한다. 공복의 시간은 장기에 휴식을 주고, 내 몸은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정화하며 세포는 자가포식이라는 놀라운 과정을 통해 새로움을 준비한다.
위와 혀에게 말한다. “잠시만 쉬자. 오늘은 여덟 시간만, 아니 하루 한 끼만 먹고 쉬어보자. 너희에게 진짜 휴식을 선물할게.” 처음에는 투정한다. “배고파, 기운 없어, 영양실조야.”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위와 혀는 오히려 더 섬세해지고, 작은 음식 한 점에도 만족과 포만감이 있다.
8. 혀와 위를 위한 최고의 보상, 이렇게 시작해 보자
결국, 혀와 위의 끝없는 요구에 무조건 응하는 것은 오히려 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할 뿐이다. 진정한 만족과 건강을 위해서는 욕구를 절제하고 감각을 회복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① 식탁에 앉아 눈을 감고 현재 마음 상태를 살핀다. 성급한 식탐이 올라올 경우, 호흡을 주시하여 잠시 그 마음을 가라앉힌다.
② 식욕이 가라앉을 때, 조용히 수저를 든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③ 씹는 동안엔 눈을 감고, 입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살핀다.
- 혀의 움직임, 침의 흐름, 씹는 리듬을 주시한다.
④ 입안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스스로 적절한 양을 먹게 된다. 이때엔 혀와 위는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왜일까? 혀는 반찬(음식)을 모른다. 김치도, 불고기도 구분 못 한다. 그저 맵고 짜고 뜨거운 자극만을 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