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발을 내딛게 하는 힘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모든 것을 걸고 힘을 쏟아낸 때가 있다.
그러나 그 힘마저 다 써버린 후,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때 다시 몸을 일으키는 다음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세속적인 동기,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운동선수, 예술가, 사업가 등, 남들보다 월등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보면 가끔 이런 의문이 든다.
“어떻게 저토록 힘을 쏟아낼 수 있을까?”
보통 우리는 어느 정도 성취하면 쉬고 싶어진다. 안주하거나, 심지어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젖 먹던 힘을 다 써도 다시 일어나, 끝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 원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어떤 ‘먹이(목표)’가 있기에 지치더라도 다시 달릴 수 있는 걸까?
대부분은 돈, 명예, 지위 같은 외적인 보상이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목표는 분명 힘이 있다.
몸이 아파도 움직이게 하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
배고픈 맹수가 먹잇감을 향해 뛰어드는 것처럼,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보상이 없을 때도, 계속 달릴 수 있을까?”
수행자도 마찬가지다.
법을 만나겠다고 결심하지만, 장애를 만나거나 조금 힘들면 금세 도망가거나, 멈추거나, 심지어 포기까지 한다.
또는 취미 삼아 하기에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는 선정과 지혜를 만나기 어렵다.
마치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중간에서 노를 놓아 버리는 것과 같다.
『대념처경』가르침
붓다는 ‘대념처경’에서 말씀하셨다.
“분명한 대상에 사띠를 빳타나(확립)하라.”
여기서 ‘분명한 대상’이란, 초점이 없는 흐릿한 상태가 아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보라는 가르침이다.
육안이 아니라 깨어 있는 마음의 눈(心眼)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지켜보라는 뜻이다.
마음의 눈을 현미경처럼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한쪽 눈만 뜨고, 그것마저 게슴츠레한 상태에서 대상을 바라본다.
그러니 대상은 불분명하고, 의식은 혼미하다.
몸을 곧추세우듯이 마음도 다잡아 곧추세우고(경각심, 마음을 북돋음)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인다.
나아가 돋보기 수준인 안정된 상태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면 대상이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미경 수준으로 대상과 대상을 틈 없이 세밀하게 지켜봐야 한다.
그럴 때 몸과 마음의 세 가지 특성인 아닛짜(무상), 둑카(고), 아낫따(무아)가 명확히 드러난다. 더 이상 ‘알려고 애쓰는 상태’가 아니라, ‘저절로 보이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이 쉼없이 이어지면,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보는 듯 몸과 마음의 참된 성품이 여실히 드러난다.
젖 먹던 힘을 넘어서는 힘
그렇다면, 젖 먹던 힘 이후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윤회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 —
즉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어리석음·집착·잘못된 견해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강렬한 의지에서 비롯된다.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먼 곳의 희미한 빛을 발견한 사람이 그 빛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처럼,
그 목표는 다시 일어서게 하고 끝까지 전진하게 하는 최강의 원동력이 된다.
끝까지 가는 힘
이 목표를 마음 깊숙이 새기고 한 걸음씩 쉼 없이 나아갈 때,
우리는 젖 먹던 힘을 넘어선, 그다음의 힘마저 끌어올릴 수 있다.
그 힘은 단순한 의욕이나 열정이 아니다.
젖 먹던 힘은 본능이 주지만, 그다음의 힘은 방향이 준다.
그 방향은 바른 견해 속에서 끝내 도달하겠다는 서원(誓願)의 불씨며,
마지막까지 지켜내는 경각심이다.
그 힘이 깨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걸음까지.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마침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게 하는 힘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모든 것을 걸고 힘을 쏟아낸 때가 있다.
그러나 그 힘마저 다 써버린 후,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때 다시 몸을 일으키는 다음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세속적인 동기,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운동선수, 예술가, 사업가 등, 남들보다 월등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보면 가끔 이런 의문이 든다.
“어떻게 저토록 힘을 쏟아낼 수 있을까?”
보통 우리는 어느 정도 성취하면 쉬고 싶어진다. 안주하거나, 심지어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젖 먹던 힘을 다 써도 다시 일어나, 끝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 원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어떤 ‘먹이(목표)’가 있기에 지치더라도 다시 달릴 수 있는 걸까?
대부분은 돈, 명예, 지위 같은 외적인 보상이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목표는 분명 힘이 있다.
몸이 아파도 움직이게 하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
배고픈 맹수가 먹잇감을 향해 뛰어드는 것처럼,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보상이 없을 때도, 계속 달릴 수 있을까?”
수행자도 마찬가지다.
법을 만나겠다고 결심하지만, 장애를 만나거나 조금 힘들면 금세 도망가거나, 멈추거나, 심지어 포기까지 한다.
또는 취미 삼아 하기에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는 선정과 지혜를 만나기 어렵다.
마치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중간에서 노를 놓아 버리는 것과 같다.
『대념처경』가르침
붓다는 ‘대념처경’에서 말씀하셨다.
“분명한 대상에 사띠를 빳타나(확립)하라.”
여기서 ‘분명한 대상’이란, 초점이 없는 흐릿한 상태가 아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보라는 가르침이다.
육안이 아니라 깨어 있는 마음의 눈(心眼)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지켜보라는 뜻이다.
마음의 눈을 현미경처럼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한쪽 눈만 뜨고, 그것마저 게슴츠레한 상태에서 대상을 바라본다.
그러니 대상은 불분명하고, 의식은 혼미하다.
몸을 곧추세우듯이 마음도 다잡아 곧추세우고(경각심, 마음을 북돋음)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인다.
나아가 돋보기 수준인 안정된 상태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면 대상이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미경 수준으로 대상과 대상을 틈 없이 세밀하게 지켜봐야 한다.
그럴 때 몸과 마음의 세 가지 특성인 아닛짜(무상), 둑카(고), 아낫따(무아)가 명확히 드러난다. 더 이상 ‘알려고 애쓰는 상태’가 아니라, ‘저절로 보이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이 쉼없이 이어지면,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보는 듯 몸과 마음의 참된 성품이 여실히 드러난다.
젖 먹던 힘을 넘어서는 힘
그렇다면, 젖 먹던 힘 이후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윤회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 —
즉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어리석음·집착·잘못된 견해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강렬한 의지에서 비롯된다.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먼 곳의 희미한 빛을 발견한 사람이 그 빛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처럼,
그 목표는 다시 일어서게 하고 끝까지 전진하게 하는 최강의 원동력이 된다.
끝까지 가는 힘
이 목표를 마음 깊숙이 새기고 한 걸음씩 쉼 없이 나아갈 때,
우리는 젖 먹던 힘을 넘어선, 그다음의 힘마저 끌어올릴 수 있다.
그 힘은 단순한 의욕이나 열정이 아니다.
젖 먹던 힘은 본능이 주지만, 그다음의 힘은 방향이 준다.
그 방향은 바른 견해 속에서 끝내 도달하겠다는 서원(誓願)의 불씨며,
마지막까지 지켜내는 경각심이다.
그 힘이 깨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걸음까지.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마침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