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스님의 + - = x ÷
많은 정신 계발법을 배우고 익히더라도 결국 위빠사나로 오거나 알지 못하면 정신 계발이 산란함만 다스리는 집중(개념과 관념)에 머물기에 어리석음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정신 계발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잊는 방법(사마타, 집중)과 하나는 자기를 아는 방법(위빠사나, 지혜)이다.
붓다의 가르침 전에는 잊는 방법만 있었고 아는 방법은 없었다. 아니 원래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가르쳐 주지를 못했다.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것은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하고 알았다는 의미이다. 무엇을 알았는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소멸, 그 방법에 대해 알았다. 이 괴로움이 일어난 곳이 우주, 자연, 인종, 하는 일,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에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아니면 우리는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당착을 죽을 때까지 안고 산다.
잊는 것이 먼저인가? 아는 것이 먼저인가? 두 가지를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대부분 고통스럽고, 힘든 상태에서 쉽게 가는 곳이 술, 노래, 오락 등이다. 연속극을 보는 동안은 고통과 근심, 걱정을 잊는다. 그러나 연속극이 끝나면 다시 현실이다. 가상 공간과 시간을 우리는 개념과 관념으로 얼마든지 쉽게 무지개, 꽃으로 장식할 수 있다.
현생 인류는 250만 년(?)간 육체만 진화했지, 정신은 석기 시대에 머물고 있지 않나 한다. 위빠사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가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까지 동서양의 많은 성인이 있었지만 직면하여 있는 그대로 보라는 가르침을 일러준 성인은 붓다 말고 없었다.
아니 자신을 대상으로 삼으라는 가르침도 없었다. 형이상, 무지개 같은 관념을 대상으로 현실을 외면하기에 자신에 대해 모를 수밖에 없다.
위빠사나가 주는 이익은 누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스스로 알 수 있다. 후회, 불안에서 벗어난다. 무서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당당해진다. 혼자 있을 수 있다. 바깥의 좋다는 것에 이끌리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세속 이익이 아닌 실제 차원에서 안다. 꾐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제까지와 다른 일직선이 아닌 다중의 관점이 생긴다. 전체를 보게 된다.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생긴다. 사물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바람직하며 실질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책이 아닌 실재인 몸과 마음의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된다. 위빠사나의 이익에 대해서 붓다께서는 ‘마음의 청정, 근심, 걱정,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스러운 길에 도달하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셨다.
위빠사나는 정신과 육체 현상의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스스로 지금 보게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마음과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더 명확하게 이해한다.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다가올 때 덜 동요하고 상황을 더 단호하게 처리한다.
우선 개념을 개념으로만 알았던 것의 연장선에서 이제부터는 개념을 실재의 개념으로 움직임에 보조 수단인 이름을 붙여보자. 징검다리로. 팔을 굽히면 “굽힘, 굽힘”, 사물을 보면 “봄, 봄”, 소리가 들리면 “들음, 들음”, 생각하면 “생각, 생각” 작은 움직임까지 촘촘하게 붙일수록 앞에 열거한 것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것이다.
5월의 하늘, 나무, 선원
담 옆의 꽃
보리수 스님의 + - = x ÷
많은 정신 계발법을 배우고 익히더라도 결국 위빠사나로 오거나 알지 못하면 정신 계발이 산란함만 다스리는 집중(개념과 관념)에 머물기에 어리석음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정신 계발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잊는 방법(사마타, 집중)과 하나는 자기를 아는 방법(위빠사나, 지혜)이다.
붓다의 가르침 전에는 잊는 방법만 있었고 아는 방법은 없었다. 아니 원래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가르쳐 주지를 못했다.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것은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하고 알았다는 의미이다. 무엇을 알았는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소멸, 그 방법에 대해 알았다. 이 괴로움이 일어난 곳이 우주, 자연, 인종, 하는 일,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에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아니면 우리는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당착을 죽을 때까지 안고 산다.
잊는 것이 먼저인가? 아는 것이 먼저인가? 두 가지를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대부분 고통스럽고, 힘든 상태에서 쉽게 가는 곳이 술, 노래, 오락 등이다. 연속극을 보는 동안은 고통과 근심, 걱정을 잊는다. 그러나 연속극이 끝나면 다시 현실이다. 가상 공간과 시간을 우리는 개념과 관념으로 얼마든지 쉽게 무지개, 꽃으로 장식할 수 있다.
현생 인류는 250만 년(?)간 육체만 진화했지, 정신은 석기 시대에 머물고 있지 않나 한다. 위빠사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가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까지 동서양의 많은 성인이 있었지만 직면하여 있는 그대로 보라는 가르침을 일러준 성인은 붓다 말고 없었다.
아니 자신을 대상으로 삼으라는 가르침도 없었다. 형이상, 무지개 같은 관념을 대상으로 현실을 외면하기에 자신에 대해 모를 수밖에 없다.
위빠사나가 주는 이익은 누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스스로 알 수 있다. 후회, 불안에서 벗어난다. 무서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당당해진다. 혼자 있을 수 있다. 바깥의 좋다는 것에 이끌리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세속 이익이 아닌 실제 차원에서 안다. 꾐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제까지와 다른 일직선이 아닌 다중의 관점이 생긴다. 전체를 보게 된다.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생긴다. 사물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바람직하며 실질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책이 아닌 실재인 몸과 마음의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된다. 위빠사나의 이익에 대해서 붓다께서는 ‘마음의 청정, 근심, 걱정,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스러운 길에 도달하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셨다.
위빠사나는 정신과 육체 현상의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스스로 지금 보게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마음과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더 명확하게 이해한다.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다가올 때 덜 동요하고 상황을 더 단호하게 처리한다.
우선 개념을 개념으로만 알았던 것의 연장선에서 이제부터는 개념을 실재의 개념으로 움직임에 보조 수단인 이름을 붙여보자. 징검다리로. 팔을 굽히면 “굽힘, 굽힘”, 사물을 보면 “봄, 봄”, 소리가 들리면 “들음, 들음”, 생각하면 “생각, 생각” 작은 움직임까지 촘촘하게 붙일수록 앞에 열거한 것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것이다.
5월의 하늘, 나무, 선원
담 옆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