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순간마다, 특히 그 누구의 위로도 닿지 않는 심연의 외로움 속에서 나는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 그 한가운데 고고히 선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은 묵묵히 앉아 계십니다. 지평선 너머로 고타마 국을 침략하려는 십만 대군이 검은 구름처럼 밀려옵니다. 그들의 선봉에 선 고타마 왕실의 젊은 방계 왕자가 군마에서 내려 부처님께 천천히 다가갑니다. 그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공손히 삼배를 올리며 말씀드립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모시겠나이다. 이곳을 피해 저기 시원한 양산(陽傘) 아래로 가시지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고요한 미소와 함께 답하십니다.
"내 종족의 그늘이 나를 편안케 하노라."
이 말씀을 들은 왕자는 깊은 침묵 속에 절을 올리고, 대군을 이끌어 왔던 길을 따라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마치 장대한 서사시의 한 장면 같은 이 광경은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킵니다. 쇠와 살로 무장한 십만 대군 앞에 홀로 선 한 수행자의 모습이 던지는 극적인 대비. 그들은 왜 아무런 말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을까요? 젊은 왕자와 그의 군사들이 느꼈던 감정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랜 명상 끝에 저는 그것이 '경외심 어린 공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무상정등각자(無上正等覺者)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지만, 홀로 앉아 침묵으로 대군에 맞서는 그 모습에서 이성을 뛰어넘는 위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수많은 제자도, 추종자도 없이 홀로 계신 그분을 해하거나 군대를 진격시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이 주는 본능적 공포일 것입니다. 인간은 미지의 공간과 낯선 이방인 앞에서, 칠흑 같은 어둠과 죽음의 심연 앞에서 전율합니다. '저분은 왜 저토록 평온한 모습으로 대군 앞에 홀로 앉아 계시는가?' 맹수가 본능적으로 상대의 기운을 읽어내듯, 영혼은 마주한 영혼의 깊이를 감지합니다. 그 차이가 압도적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비록 한 사람, 단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감은 마치 태양보다 거대한 항성마저 삼키는 블랙홀처럼 십만 대군의 영혼을 압도했을 것입니다.
코뿔소를 떠올리면 자신보다 훨씬 큰 하마나 코끼리와 싸우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큰 하마도, 코끼리조차도 코뿔소의 날카로운 뿔을 맞으면 치명상을 입고 물러납니다. 그 예리한 뿔 앞에서는 어떤 거대한 생명체도 물러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연계의 가장 작은 생명체조차 자신만의 방어 기제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꿀벌의 독침, 식물의 가시, 박테리아의 독소, 심지어 생명의 경계에 선 바이러스조차 견고한 다면체 구조로 자신을 보호합니다.
수행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의 깊이를 탐구하며 마주하는 번뇌와 시련에 맞설 무기가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소의 뿔'과 같은 수행의 무기를 주셨으니, 이를 굳건히 지니고 내외의 번뇌를 헤쳐 나갑니다. 무소의 뿔은 그 단단한 뿌리에서 힘을 얻습니다. 견고한 골격이 뿌리처럼 박혀 있어 어떤 충격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뿔의 끝은 날카로운 침처럼 가늘어지며, 부딪힐 때마다 끝이 부러져도 다시 자라나 예리함을 유지합니다. 수행자들 또한 오계라는 견고한 기반 위에서 번뇌의 침입을 막아내고, 사띠와 사마디, 위빠사나를 통해 마음을 정화하며 집중의 불꽃을 키워갑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거친 번뇌부터 차례로 제거하고, 점차 미세한 번뇌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시련이 닥쳐도 동요하지 않고 그 인과를 살펴, 물질과 정신을 분별하여 보면 결국 물질은 티끌과 같고 정신적 요소는 욕망의 환영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혀 두려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근본적인 번뇌의 뿌리와 맞서기 위해 우리는 뿔을 돌립니다.
수행의 여정에서 집중력이 분수처럼 솟구칠 때면 내면의 에너지가 고조되고, 반대로 집중이 흐트러질 때는 스스로의 뿔에 찔리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이때는 주변 사람들의 결점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성냄이 커지고, 불쾌감과 혐오감이 증폭되어 답답함에 빠지곤 합니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날카로움을 드러내어 '까다로운 수행자'라는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뿔에 찔려 집중이 흐트러졌음을 알아차리면, 다시금 마음을 모아 구심력을 강화합니다. 이처럼 침단(針端)을 오르내리며 집중력이 변화하는 과정을 거듭하다 보면, 번뇌와의 대면이 더 이상 고된 싸움이 아닌 수행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전장(戰場)을 운동장으로 여기는 노련한 전사처럼, 내외의 번뇌가 이제는 마음을 단련하는 도구로 전환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층층이 쌓여가며, 마침내 내면의 번뇌조차도 수행의 스승임을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이제는 자유롭게 마음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의지대로 내면의 흐름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문득 살펴보니, 한때는 날카로웠던 뿔이 이제는 꽃봉오리를 맺은 나뭇가지로 변모해 있습니다. 안정된 평정심으로 활짝 만발한 연꽃 위에 머물 때면, 비록 큰 슬픔도 큰 기쁨도 없지만, 저절로 번지는 입가의 미소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고독한 순간마다, 특히 그 누구의 위로도 닿지 않는 심연의 외로움 속에서 나는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 그 한가운데 고고히 선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은 묵묵히 앉아 계십니다. 지평선 너머로 고타마 국을 침략하려는 십만 대군이 검은 구름처럼 밀려옵니다. 그들의 선봉에 선 고타마 왕실의 젊은 방계 왕자가 군마에서 내려 부처님께 천천히 다가갑니다. 그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공손히 삼배를 올리며 말씀드립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모시겠나이다. 이곳을 피해 저기 시원한 양산(陽傘) 아래로 가시지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고요한 미소와 함께 답하십니다.
"내 종족의 그늘이 나를 편안케 하노라."
이 말씀을 들은 왕자는 깊은 침묵 속에 절을 올리고, 대군을 이끌어 왔던 길을 따라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마치 장대한 서사시의 한 장면 같은 이 광경은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킵니다. 쇠와 살로 무장한 십만 대군 앞에 홀로 선 한 수행자의 모습이 던지는 극적인 대비. 그들은 왜 아무런 말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을까요? 젊은 왕자와 그의 군사들이 느꼈던 감정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랜 명상 끝에 저는 그것이 '경외심 어린 공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무상정등각자(無上正等覺者)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지만, 홀로 앉아 침묵으로 대군에 맞서는 그 모습에서 이성을 뛰어넘는 위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수많은 제자도, 추종자도 없이 홀로 계신 그분을 해하거나 군대를 진격시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이 주는 본능적 공포일 것입니다. 인간은 미지의 공간과 낯선 이방인 앞에서, 칠흑 같은 어둠과 죽음의 심연 앞에서 전율합니다. '저분은 왜 저토록 평온한 모습으로 대군 앞에 홀로 앉아 계시는가?' 맹수가 본능적으로 상대의 기운을 읽어내듯, 영혼은 마주한 영혼의 깊이를 감지합니다. 그 차이가 압도적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비록 한 사람, 단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감은 마치 태양보다 거대한 항성마저 삼키는 블랙홀처럼 십만 대군의 영혼을 압도했을 것입니다.
코뿔소를 떠올리면 자신보다 훨씬 큰 하마나 코끼리와 싸우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큰 하마도, 코끼리조차도 코뿔소의 날카로운 뿔을 맞으면 치명상을 입고 물러납니다. 그 예리한 뿔 앞에서는 어떤 거대한 생명체도 물러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연계의 가장 작은 생명체조차 자신만의 방어 기제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꿀벌의 독침, 식물의 가시, 박테리아의 독소, 심지어 생명의 경계에 선 바이러스조차 견고한 다면체 구조로 자신을 보호합니다.
수행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의 깊이를 탐구하며 마주하는 번뇌와 시련에 맞설 무기가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소의 뿔'과 같은 수행의 무기를 주셨으니, 이를 굳건히 지니고 내외의 번뇌를 헤쳐 나갑니다. 무소의 뿔은 그 단단한 뿌리에서 힘을 얻습니다. 견고한 골격이 뿌리처럼 박혀 있어 어떤 충격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뿔의 끝은 날카로운 침처럼 가늘어지며, 부딪힐 때마다 끝이 부러져도 다시 자라나 예리함을 유지합니다. 수행자들 또한 오계라는 견고한 기반 위에서 번뇌의 침입을 막아내고, 사띠와 사마디, 위빠사나를 통해 마음을 정화하며 집중의 불꽃을 키워갑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거친 번뇌부터 차례로 제거하고, 점차 미세한 번뇌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시련이 닥쳐도 동요하지 않고 그 인과를 살펴, 물질과 정신을 분별하여 보면 결국 물질은 티끌과 같고 정신적 요소는 욕망의 환영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혀 두려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근본적인 번뇌의 뿌리와 맞서기 위해 우리는 뿔을 돌립니다.
수행의 여정에서 집중력이 분수처럼 솟구칠 때면 내면의 에너지가 고조되고, 반대로 집중이 흐트러질 때는 스스로의 뿔에 찔리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이때는 주변 사람들의 결점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성냄이 커지고, 불쾌감과 혐오감이 증폭되어 답답함에 빠지곤 합니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날카로움을 드러내어 '까다로운 수행자'라는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뿔에 찔려 집중이 흐트러졌음을 알아차리면, 다시금 마음을 모아 구심력을 강화합니다. 이처럼 침단(針端)을 오르내리며 집중력이 변화하는 과정을 거듭하다 보면, 번뇌와의 대면이 더 이상 고된 싸움이 아닌 수행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전장(戰場)을 운동장으로 여기는 노련한 전사처럼, 내외의 번뇌가 이제는 마음을 단련하는 도구로 전환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층층이 쌓여가며, 마침내 내면의 번뇌조차도 수행의 스승임을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이제는 자유롭게 마음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의지대로 내면의 흐름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문득 살펴보니, 한때는 날카로웠던 뿔이 이제는 꽃봉오리를 맺은 나뭇가지로 변모해 있습니다. 안정된 평정심으로 활짝 만발한 연꽃 위에 머물 때면, 비록 큰 슬픔도 큰 기쁨도 없지만, 저절로 번지는 입가의 미소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