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도대체 무엇인가?
불교는 생로병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는 원대한 프로젝트다.
그리고 생로병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이 효용을 가지려면 우선,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괴롭고 힘든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절절한 인식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불교의 가르침은 무용할 것이다. (삶이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얻고 누려야 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가득한 사람에게 불교의 가르침은 염세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생로병사가 괴로운 일임을 알아보는 것은 비관적(pessimistic)이 아니라 현실적(realistic)인 태도라고 해야 맞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는 윤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를 윤회에 "단단히 묶어두는(상요자나 saṃyojana)" 번뇌(kilesa, 족쇄, fetters)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서 번뇌란 탐진치 등 순간순간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안 좋은(불선업) 마음을 말한다. (물론, 선업 마음도 "업"이 되기 때문에 윤회를 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불선업 마음보다는 좋은 생으로 윤회하게 한다고 한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번뇌를 위빠사나 지혜로 제거하고, 그것의 힘이 쌓이고 쌓이면 네 가지(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도 지혜와 과 지혜가 일어나는데, 도 지혜가 지금까지 세세생생 쌓아온 번뇌를 뿌리째 뽑아내는 힘이 있다고 한다. 세세생생 쌓아온 번뇌를 뿌리째 뽑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생로병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시간관은 매우 원대하다. 이번 생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에서 이번 생을 거쳐 앞으로도 한동안 끝없이(아라한이 되어야 끝날) 내생으로 향하는 매우 원대한 시간관이다. 이 원대한 시간관에서 볼 때 수많은 생 중에 이번 생에 우리가 욕심내고 화내며 아웅다웅 어리석게 사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면서 떠올려야 하는(그리고 실제로 떠올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왜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났으며, 죽어서 어떻게 되고,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물음에 대해 그저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으로만 남겨두고 있지 않은가? 불교는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고 있다. 이것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불교는 도대체 무엇인가?
불교는 생로병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는 원대한 프로젝트다.
그리고 생로병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이 효용을 가지려면 우선,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괴롭고 힘든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절절한 인식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불교의 가르침은 무용할 것이다. (삶이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얻고 누려야 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가득한 사람에게 불교의 가르침은 염세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생로병사가 괴로운 일임을 알아보는 것은 비관적(pessimistic)이 아니라 현실적(realistic)인 태도라고 해야 맞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는 윤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를 윤회에 "단단히 묶어두는(상요자나 saṃyojana)" 번뇌(kilesa, 족쇄, fetters)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서 번뇌란 탐진치 등 순간순간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안 좋은(불선업) 마음을 말한다. (물론, 선업 마음도 "업"이 되기 때문에 윤회를 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불선업 마음보다는 좋은 생으로 윤회하게 한다고 한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번뇌를 위빠사나 지혜로 제거하고, 그것의 힘이 쌓이고 쌓이면 네 가지(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도 지혜와 과 지혜가 일어나는데, 도 지혜가 지금까지 세세생생 쌓아온 번뇌를 뿌리째 뽑아내는 힘이 있다고 한다. 세세생생 쌓아온 번뇌를 뿌리째 뽑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생로병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시간관은 매우 원대하다. 이번 생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에서 이번 생을 거쳐 앞으로도 한동안 끝없이(아라한이 되어야 끝날) 내생으로 향하는 매우 원대한 시간관이다. 이 원대한 시간관에서 볼 때 수많은 생 중에 이번 생에 우리가 욕심내고 화내며 아웅다웅 어리석게 사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면서 떠올려야 하는(그리고 실제로 떠올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왜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났으며, 죽어서 어떻게 되고,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물음에 대해 그저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으로만 남겨두고 있지 않은가? 불교는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고 있다. 이것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