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이메일 확인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스팸 메일이거나 광고 메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날은 이메일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이메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수많은 광고 메일 사이에서 열흘 전에 보리수선원에서 온 메일이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늦게 확인하여 죄송스럽기도 해서 얼른 내용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메일에는 짤막하게 "무소의 뿔에 한 달에 세 번 글 게재할 수 있는지요?"라는 내용 뿐이었습니다. 순간 제 깜냥이 글을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 수행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선원장 스님께 글을 써보겠다고 답장을 드렸습니다.
답장을 드리고 나서 부랴부랴 '무소의 뿔'에 들어가 선배 수행자님들의 글을 찬찬히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고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선배 수행자님들의 글을 읽으니, 수행 경험이 부족한 제가 수행담을 글로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솔직해지기로 했습니다. ‘무소의 뿔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나처럼 수행을 막 시작했거나 점차 흥미를 가지는 수행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글이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글의 방향이 정해져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무소의 뿔에 새롭게 글을 올리게 된 김성현 수행자입니다. 보리수 선원과의 인연을 먼저 말씀드리면, 2000년대 초반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보리수 선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과천 보리수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하게 된 것은 아마 코로나19가 유행하기 1~2년 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자란 저로서는 테라와다 전통의 남방불교에 발을 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확신을 준 것은 서점에서 우연히 본 책, 불광출판사에서 나온 '대승은 끝났다'였습니다. 제목이 다소 공격적이었지만, 책에서는 기본자세, 계율 조목, 실체 사상, 수행 방법에 있어서 대승불교가 불교일 수 없다는 문제점을 니까야(빨리어 경전)를 근거로 하나하나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대승불교를 당연하게 여기던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마치 평생을 친부모로 알고 있던 분들이 사실 친부모가 아니었던 것과 맞먹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가르침은 닙바나(열반)를 목표로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즉 부처님의 설법은 발심에서 닙바나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벽한 정합성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끼리 약속을 정할 때 한 사람은 서울로 가자 하고, 다른 사람은 부산으로 가자 하면 그 약속은 정합성이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정합성은 여러 정보나 상황이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룸을 뜻합니다. 책에서는 니까야를 근거로 부처님의 말씀대로 수행하면 유일한 길, 닙바나로 향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와 대승 불교의 견해 차이에서 오던 혼란이 정리되고 확신이 생기자, 곽노숙 수행자님의 지도로 보리수 선원에서 기본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직장인 수행을 거쳐 일요 수행에 참석하다가 지금은 시간이 될 때마다 토요 수행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는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보리수 선원 아침 수행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닙바나(열반)는 많은 사람에게 오해되어 왔고, 지금도 오해되고 있는 용어인 듯합니다. 대승 불교권에서는 ‘열반에 들었다’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불교 신자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열반을 죽음이나 소멸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지인에게 ‘당신이 닙바나(열반)에 들기를 기원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말처럼 들린다고 하여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닙바나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 니까야 경전에서 닙바나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 닙바나에 해당하는 동사(nibbati)는 “불이 꺼졌다”(aggi nibbuto, 맛지마 니까야)라는 과거형으로 사용됩니다.
- “태어남은 끝났다. 신성한 실천을 마쳤다. 할 일을 해냈다. 다시는 이러한 상태로 되지 않는다.” (상윳다 니까야)
- “맑은 호수 속 물고기를 보듯이” (디나 니까야)
-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며” (맛지마 니까야)
- “생성됨의 소멸” (상윳다 니까야)
- “탐·진·치의 소멸” (상윳다 니까야)
- “형성되지 않는 것” (상윳다 니까야)
- “‘존재유형(sakkaya, 有身)의 소멸’을 직접 알 때 번뇌의 유입 없이 완전히 꺼지게 된다. 성자들은 이를 즐거움으로 보지만 세상 모두는 반대로 본다.” (상윳다 니까야)
- 부처님이 전법을 망설인 이유도 연기라는 진리의 난해함과 닙바나라는 결과에 대한 중생의 거부감,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상윳다 니까야)
- “갈애는 윤회의 근원이요 고통의 원인이니, 갈애를 끊으면 닙바나를 얻고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법공덕 중에서)
- “여래께서 설하신 담마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내적 고요함으로 닙바나에 이르며 올바른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자아를 다스리는 다섯 가지 중에서)
이당 메- 뿐냥 나의 선업 공덕으로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예불문 회향 중에서)
요즘은 이메일 확인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스팸 메일이거나 광고 메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날은 이메일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이메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수많은 광고 메일 사이에서 열흘 전에 보리수선원에서 온 메일이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늦게 확인하여 죄송스럽기도 해서 얼른 내용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메일에는 짤막하게 "무소의 뿔에 한 달에 세 번 글 게재할 수 있는지요?"라는 내용 뿐이었습니다. 순간 제 깜냥이 글을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 수행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선원장 스님께 글을 써보겠다고 답장을 드렸습니다.
답장을 드리고 나서 부랴부랴 '무소의 뿔'에 들어가 선배 수행자님들의 글을 찬찬히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고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선배 수행자님들의 글을 읽으니, 수행 경험이 부족한 제가 수행담을 글로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솔직해지기로 했습니다. ‘무소의 뿔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나처럼 수행을 막 시작했거나 점차 흥미를 가지는 수행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글이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글의 방향이 정해져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무소의 뿔에 새롭게 글을 올리게 된 김성현 수행자입니다. 보리수 선원과의 인연을 먼저 말씀드리면, 2000년대 초반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보리수 선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과천 보리수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하게 된 것은 아마 코로나19가 유행하기 1~2년 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자란 저로서는 테라와다 전통의 남방불교에 발을 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확신을 준 것은 서점에서 우연히 본 책, 불광출판사에서 나온 '대승은 끝났다'였습니다. 제목이 다소 공격적이었지만, 책에서는 기본자세, 계율 조목, 실체 사상, 수행 방법에 있어서 대승불교가 불교일 수 없다는 문제점을 니까야(빨리어 경전)를 근거로 하나하나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대승불교를 당연하게 여기던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마치 평생을 친부모로 알고 있던 분들이 사실 친부모가 아니었던 것과 맞먹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가르침은 닙바나(열반)를 목표로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즉 부처님의 설법은 발심에서 닙바나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벽한 정합성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끼리 약속을 정할 때 한 사람은 서울로 가자 하고, 다른 사람은 부산으로 가자 하면 그 약속은 정합성이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정합성은 여러 정보나 상황이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룸을 뜻합니다. 책에서는 니까야를 근거로 부처님의 말씀대로 수행하면 유일한 길, 닙바나로 향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와 대승 불교의 견해 차이에서 오던 혼란이 정리되고 확신이 생기자, 곽노숙 수행자님의 지도로 보리수 선원에서 기본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직장인 수행을 거쳐 일요 수행에 참석하다가 지금은 시간이 될 때마다 토요 수행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는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보리수 선원 아침 수행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닙바나(열반)는 많은 사람에게 오해되어 왔고, 지금도 오해되고 있는 용어인 듯합니다. 대승 불교권에서는 ‘열반에 들었다’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불교 신자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열반을 죽음이나 소멸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지인에게 ‘당신이 닙바나(열반)에 들기를 기원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말처럼 들린다고 하여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닙바나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 니까야 경전에서 닙바나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당 메- 뿐냥 나의 선업 공덕으로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예불문 회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