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은 그 전체 크기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풍의 강도, 풍속 차이, 폭풍의 대류 조직 등 다양한 역학적・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습니다. 일반적으로 강한 태풍일수록 작고 선명한 눈을 가지며, 약한 태풍은 상대적으로 크거나 흐릿한 눈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늦가을, 동남아에서 거대한 태풍이 대륙으로 북상한다는 뉴스를 보고 GPT에 검색해보았다. 태풍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기계는 내연기관과 같은 엔진이 중심부에서 힘을 만들어내지만, 태풍의 중심은 오히려 고요하기만 하다. 그저 바다 어딘가에서 홀연히 생겨나 크기를 키워가며 이동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태풍이 강력할수록 그 중심에는 더욱 단단하고 고요한 공간이 자리 잡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고요함의 깊이가 태풍의 위력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을까?
다섯 번째쯤 되는 집중 수행의 마지막 무렵이었다. 스님의 지도 아래 처음부터 진지하게 임했지만, 어김없이 삼일 째 되던 날 지루함이 밀려왔다. 30-40분간 경행하며 발의 움직임과 감각에 집중하고, 10분간 좌선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시공간. 가끔 들리는 창밖 자동차 소리조차 숨 막히는 단조로움 속 구원과도 같았다. 지난 수행에선 통증이 있어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고 강렬한 환상도 겪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도전조차 없는 맹물 같은 수행이 지속되었다. 너무 너무 너무 지루해서 차라리 노역을 하는 게 더 낳을 것도 같았다. 그 어떤 지루한 일들도 차라리 이런 지루함 보다는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리라. 무료함, 변화 없음이 이렇게 무거운 중력으로 내 마음을 짓누를 수 있음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식은땀까지 나는 무료함이 주는 중압감의 절정에서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왜 재밌어야만 하는가?’
왜 재밌어야만 하는가?
재밌어야 할 당위는 무엇인가?
재미없으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나의 마음은 왜 ‘재미’란걸 끊임없이 누려야만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나의 삶은 재밌고 즐겁고 행복해야만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살아오고 있었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어디서 이런 가정이 생긴 것일까? 왜 그동안 그 진위를 아무 의심 없이 따르고 살아왔던가? 내 삶이 저주 받은 양 항상 불행해야하고 가난해야만 하고 부서져야만 할 이유가 없듯이 반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고 마음을 짓누르는 지루함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편안함 가운데 발바닥에서 느껴짐이 더 풍부해졌고 좌선 시 번뇌에 대한 집착도 약해져 생각의 변화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주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주의도 깊어지고 혼침도 덜 일어나게 되어 또렷한 의식 상태가 지속되었다. 명칭도 계속 붙여가며 움직임과 생각을 관찰했는데, 어느 순간 명칭을 붙이는 속도가 변화를 못 쫓아가 명칭 붙임을 그만두고 차라리 빠른 변화만을 긴밀히 관찰하고자 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느낌과 생각의 빠른 변화를 포착하다보니 게임을 하는 듯 박진감이 넘쳤고, 빠른 속도와 함께 하는 가운데 흥미진진한 재미도 뒤따르게 되었다.
인터뷰 시간이 되어 스님께 그동안의 경과를 말씀드렸다. 그동안 제 마음에게 재미있는 경험을 갖다 바치기 위해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고. 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끝없이 재미와 기쁨을 요구하는데, 만약 가능하다면 먹을 것도 먹고 또 먹어 만약 땅도 먹을 수 있다면 이 바닥조차도 먹고도 남았을 것 같다고 하였다. 스님께선 명칭을 붙여가며 수행하고 있는지 물어 보셨기에 너무 빠른 변화를 관찰할 때는 명칭이 오히려 방해가 되어 그저 주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스님께선 ‘계속 수행하라’ 한 마디만 하셨고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계속 수행을 이어 나갔다.
이제 벌써 수년이 지난 일이 되었지만 지금도 그 강렬한 물음이 떠오른다. 내 마음이 원함에 대한 절대적 당위성이 없기에 그에 따른 추구함도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일들은 내게 주어진 의무로써 묵묵히 행하지만 이때도 ‘내가 이것보다는 더 기분 좋은 행위를 해야 하는데’하는 생각보다는 그 순간의 행위만을 면밀히 관찰함이 바른 길임을 자각한다. 그럴 때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머리에 쥐가 나지 않고 얼음위에 미끄러지듯 할 수 있는 대로만 할 뿐이고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이는 내 상관할 바가 아님으로 여긴다. 신기하게도 예전보다 생각의 자유도와 폭이 넓어짐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어떤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삼손이 자신의 힘의 근원이 자르지 않은 긴 머리카락에 있다고 말했듯, 나도 만약 내게 힘이 있다면 이는 내면의 공허함에 있음이라 말할 것 같다. 더 정확히는 힘이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고요함은 항상 그 자리에 있되, 때로는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고, 때로는 감추어질 뿐이다. 비록 몸은 삶이라는 태풍의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세상 아닌 곳에서 고요히 거주하면서 흔들림 없는 편안함으로 갈 길을 옮길 수 있을 것만 같다.
'태풍의 눈은 그 전체 크기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풍의 강도, 풍속 차이, 폭풍의 대류 조직 등 다양한 역학적・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습니다. 일반적으로 강한 태풍일수록 작고 선명한 눈을 가지며, 약한 태풍은 상대적으로 크거나 흐릿한 눈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늦가을, 동남아에서 거대한 태풍이 대륙으로 북상한다는 뉴스를 보고 GPT에 검색해보았다. 태풍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기계는 내연기관과 같은 엔진이 중심부에서 힘을 만들어내지만, 태풍의 중심은 오히려 고요하기만 하다. 그저 바다 어딘가에서 홀연히 생겨나 크기를 키워가며 이동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태풍이 강력할수록 그 중심에는 더욱 단단하고 고요한 공간이 자리 잡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고요함의 깊이가 태풍의 위력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을까?
다섯 번째쯤 되는 집중 수행의 마지막 무렵이었다. 스님의 지도 아래 처음부터 진지하게 임했지만, 어김없이 삼일 째 되던 날 지루함이 밀려왔다. 30-40분간 경행하며 발의 움직임과 감각에 집중하고, 10분간 좌선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시공간. 가끔 들리는 창밖 자동차 소리조차 숨 막히는 단조로움 속 구원과도 같았다. 지난 수행에선 통증이 있어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고 강렬한 환상도 겪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도전조차 없는 맹물 같은 수행이 지속되었다. 너무 너무 너무 지루해서 차라리 노역을 하는 게 더 낳을 것도 같았다. 그 어떤 지루한 일들도 차라리 이런 지루함 보다는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리라. 무료함, 변화 없음이 이렇게 무거운 중력으로 내 마음을 짓누를 수 있음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식은땀까지 나는 무료함이 주는 중압감의 절정에서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왜 재밌어야만 하는가?’
왜 재밌어야만 하는가?
재밌어야 할 당위는 무엇인가?
재미없으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나의 마음은 왜 ‘재미’란걸 끊임없이 누려야만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나의 삶은 재밌고 즐겁고 행복해야만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살아오고 있었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어디서 이런 가정이 생긴 것일까? 왜 그동안 그 진위를 아무 의심 없이 따르고 살아왔던가? 내 삶이 저주 받은 양 항상 불행해야하고 가난해야만 하고 부서져야만 할 이유가 없듯이 반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고 마음을 짓누르는 지루함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편안함 가운데 발바닥에서 느껴짐이 더 풍부해졌고 좌선 시 번뇌에 대한 집착도 약해져 생각의 변화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주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주의도 깊어지고 혼침도 덜 일어나게 되어 또렷한 의식 상태가 지속되었다. 명칭도 계속 붙여가며 움직임과 생각을 관찰했는데, 어느 순간 명칭을 붙이는 속도가 변화를 못 쫓아가 명칭 붙임을 그만두고 차라리 빠른 변화만을 긴밀히 관찰하고자 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느낌과 생각의 빠른 변화를 포착하다보니 게임을 하는 듯 박진감이 넘쳤고, 빠른 속도와 함께 하는 가운데 흥미진진한 재미도 뒤따르게 되었다.
인터뷰 시간이 되어 스님께 그동안의 경과를 말씀드렸다. 그동안 제 마음에게 재미있는 경험을 갖다 바치기 위해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고. 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끝없이 재미와 기쁨을 요구하는데, 만약 가능하다면 먹을 것도 먹고 또 먹어 만약 땅도 먹을 수 있다면 이 바닥조차도 먹고도 남았을 것 같다고 하였다. 스님께선 명칭을 붙여가며 수행하고 있는지 물어 보셨기에 너무 빠른 변화를 관찰할 때는 명칭이 오히려 방해가 되어 그저 주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스님께선 ‘계속 수행하라’ 한 마디만 하셨고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계속 수행을 이어 나갔다.
이제 벌써 수년이 지난 일이 되었지만 지금도 그 강렬한 물음이 떠오른다. 내 마음이 원함에 대한 절대적 당위성이 없기에 그에 따른 추구함도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일들은 내게 주어진 의무로써 묵묵히 행하지만 이때도 ‘내가 이것보다는 더 기분 좋은 행위를 해야 하는데’하는 생각보다는 그 순간의 행위만을 면밀히 관찰함이 바른 길임을 자각한다. 그럴 때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머리에 쥐가 나지 않고 얼음위에 미끄러지듯 할 수 있는 대로만 할 뿐이고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이는 내 상관할 바가 아님으로 여긴다. 신기하게도 예전보다 생각의 자유도와 폭이 넓어짐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어떤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삼손이 자신의 힘의 근원이 자르지 않은 긴 머리카락에 있다고 말했듯, 나도 만약 내게 힘이 있다면 이는 내면의 공허함에 있음이라 말할 것 같다. 더 정확히는 힘이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고요함은 항상 그 자리에 있되, 때로는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고, 때로는 감추어질 뿐이다. 비록 몸은 삶이라는 태풍의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세상 아닌 곳에서 고요히 거주하면서 흔들림 없는 편안함으로 갈 길을 옮길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