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전쯤인가? 텔레비전으로 드라마 <허준>을 볼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극을 즐겨 보진 않지만, 가족들과 보다가 어느새 푹 빠져 봤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 한 회가 끝나면 다음 회의 허준이 걱정되어 어린 마음에 잠을 이루다가도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드라마가 끝날 때쯤 나오던 노래였다. 그동안 들어오던 드라마 OST가 아니었다. 노래에 굉장히 잘 어울리는 발음과 음 하나하나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고급스러운 발성이 인상적이었다. 정제된 감정은 오히려 짙은 호소력까지 불러왔다. 도대체 누굴까? 알고 보니 그 노래는 성악가 조수미가 부른 <불인별곡>이었다.

그 후로 십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 조수미의 공연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그동안 내가 알던 목소리는 조수미의 목소리가 아니었구나 하며 보는 내내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공연 후에 공연장에서 산 CD를 집에서 들어봤지만 역시나 다른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조수미의 목소리를 찾게 된다. 며칠 전 유튜브로 조수미의 노래를 듣다가 조수미와 카라얀의 영상을 보게 됐다. 조수미가 지휘자 카라얀을 처음 만나 오디션을 본 영상인데, 특유의 카리스마와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카라얀은 당시 신예였던 조수미의 노래를 듣고 사려 깊은 조언을 해준다.

인터뷰 중에 카라얀은 조수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넌 이 음악의 흐름을 익히고 있어.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네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음악은 흐르니까.”

여기에 ‘음악’이란 두 글자 대신 ‘춤’이나 ‘그림’ 등 다른 분야를 넣어도 문장은 자연스럽게 성립한다. 그만큼 카라얀이 남긴 말은 어떤 영역의 정통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의 흐름을 익힌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아마도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낸다는 게 아닐까. ‘자연스러움’.

봄에는 꽃들이 피어난다. 여름에는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든다. 가을에는 붉은색 단풍들이 하나둘 모두 떨어지고, 겨울에는 앙상함이 새로움을 기약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차이가 확연하지만, 그 사이사이 이음새는 끊김이 없이 자연스럽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산다는 건 한 장의 꽃잎이 되고 잎사귀가 되어 계절이 주는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세상의 탁함에 물들지 않고 말이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 이런 글을 남기셨다.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그와 같은 책은 지식이나 문자로 쓰여진 게 아니라 우주의 입김 같은 것에 의해 쓰여졌을 것 같다. 그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시간 밖에서 온전히 쉴 수 있다.”

“우주의 입김 같은 것”은 ‘자연스러움’의 다른 표현인 것 같다. 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다른 곳에 마음이 가도 다시 숨으로 돌아오는 것, 그럼으로써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 같은 탁함을 서서히 걷어내고 우주의 입김 같은 숨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자연스러움 즉,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마침내 시간 밖에서 온전히 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