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도 두터운 붓다의 가르침
붓다의 가르침은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려운 깊이와 두터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심오한 가르침을 접할 때 우리는 흔히 세 가지 실수를 범한다.
첫째, 세속적 가치관으로 출세간적 진리를 이해하려 한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하다'는 세속적 논리에 익숙하다. 그래서 '비움으로써 얻는 자유'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큰 고통을 겪기 전까지는, 이런 가르침이 남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 소유가 아닌 비움에 있다는 것을 경험할 때, 비로소 붓다의 가르침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둘째,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만을 추구한다. 많은 이들이 계율과 수행의 단계적 과정 없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또는 전통적 수행법을 모두 부정하고 '새로운 방법'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인과의 법칙은 분명하다. 올바른 원인 없이 바른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불법승 삼보와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수행의 기초다.
셋째, 가르침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에만 매달린다. 대표적인 예가 채식과 계율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다. 채식은 생명에 대한 자비심의 표현으로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를 깨달음의 절대 조건으로 오해하면 본말이 전도된다. 계율 역시 마찬가지다. 계율은 궁극적으로 마음의 청정을 위한 도구지만, 계율 자체에 집착하면 오히려 수행의 장애가 된다.
붓다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길과 극단적 고행의 길 모두를 경계하셨다. 대신 중도(中道)를 설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팔정도다. 올바른 견해에서 시작하여 바른 집중에 이르는 이 여덟 가지 길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으로 요약된다.
결국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른다는 것은, 보시와 지계의 기초 위에서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고(苦)와 그 소멸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고도 두터운 붓다 가르침의 핵심이다.
깊고도 두터운 붓다의 가르침
붓다의 가르침은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려운 깊이와 두터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심오한 가르침을 접할 때 우리는 흔히 세 가지 실수를 범한다.
첫째, 세속적 가치관으로 출세간적 진리를 이해하려 한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하다'는 세속적 논리에 익숙하다. 그래서 '비움으로써 얻는 자유'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큰 고통을 겪기 전까지는, 이런 가르침이 남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 소유가 아닌 비움에 있다는 것을 경험할 때, 비로소 붓다의 가르침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둘째,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만을 추구한다. 많은 이들이 계율과 수행의 단계적 과정 없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또는 전통적 수행법을 모두 부정하고 '새로운 방법'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인과의 법칙은 분명하다. 올바른 원인 없이 바른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불법승 삼보와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수행의 기초다.
셋째, 가르침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에만 매달린다. 대표적인 예가 채식과 계율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다. 채식은 생명에 대한 자비심의 표현으로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를 깨달음의 절대 조건으로 오해하면 본말이 전도된다. 계율 역시 마찬가지다. 계율은 궁극적으로 마음의 청정을 위한 도구지만, 계율 자체에 집착하면 오히려 수행의 장애가 된다.
붓다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길과 극단적 고행의 길 모두를 경계하셨다. 대신 중도(中道)를 설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팔정도다. 올바른 견해에서 시작하여 바른 집중에 이르는 이 여덟 가지 길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으로 요약된다.
결국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른다는 것은, 보시와 지계의 기초 위에서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고(苦)와 그 소멸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고도 두터운 붓다 가르침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