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선원에 첫발을 디디고 얼마 후 토요일 법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 예불문을 보았는데 딱딱하고 견고한 붉은 표지에 황금색으로 쓰인 글귀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신성함으로 다가왔다. 미소 수행자께서 법회를 진행해 주었는데 먼저 삼배(三拜)를 올린 후 법회에 참여한 여러 수행자와 함께 예불문을 독송하게 되었다.
빨리어로 쓰여져 있으나 어떻게 발음하는지 한글로 표기되어 있으니 읽는 것에는 문제없지만 처음 접하는 문구들과 평소 일상에서 사용하던 언어와는 좀 차이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긴장감이 있는 상태였고 나름 눈치 껏 목소리 톤과 속도를 조절해 가며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후 법회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더불어 매일 진행되는 온라인 수행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예불문을 독송할 기회가 자주 있게 되었고, 예불문에 실린 문구들은 말과 글로써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 삶으로 스며들었다. 예를 들면, 어떤 하루를 보냈더라도 저녁 수행에 참여해 삼귀의와 오계를 읽으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또한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자연스레 가르마가 타진다. 이러다 보니 어느 날에는 문득 예불문이 참 좋은 친구라고 생각되었다.
좋은 친구는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위로하며 편안하게 하고 그 스스로 바른 길로 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친구인 나도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처럼 예불문이 나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고 상가의 보호를 받듯 예불문 또한 곁에 있는 좋은 친구로 나를 보호한다.
지난 봄에는 일본에 잠깐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여유 시간이 있어 숙소에서 가까운 사찰 몇 곳을 방문했었다. 불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한국에서도 사찰이라고 하는 곳을 방문한 것은 한참 사람들과 어울려 등산 다닐 때 목적지인 산 아래에 있는 사찰에 가본 것이 다였던 터다.
몇 곳의 사찰 중 도초지(東張寺)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크다는 목조 좌불 앞에 섰을 때의 일이다. 불상을 바라보며 합장하였는데 나도 모르게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를 읊조리며 부처님께 경배를 올린 것이다. 관람하던 일본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함께 간 아들도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부처님께 경배드리는 문구라고 말해주는데 마음이 경건했고 뿌듯함이 차올랐었다.
지난주 수요 수행에서는 자애 게송 독송 중 ‘모든 중생, 고통에서 벗어나기를’하고 소리 내어 읽는데 마음이 뭉클했다. 순간 참 감사하고 행복함이 일어났는데 예불문을 독송할 때면 이런 뭉클함을 자주 경험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쩌다 인연이 되어 처음 수행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도 있을 때면 짧은 소견이지만 예불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곁에 두면 좋은 친구를 그들도 알았으면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일어난다.
보리수 선원에 첫발을 디디고 얼마 후 토요일 법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 예불문을 보았는데 딱딱하고 견고한 붉은 표지에 황금색으로 쓰인 글귀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신성함으로 다가왔다. 미소 수행자께서 법회를 진행해 주었는데 먼저 삼배(三拜)를 올린 후 법회에 참여한 여러 수행자와 함께 예불문을 독송하게 되었다.
빨리어로 쓰여져 있으나 어떻게 발음하는지 한글로 표기되어 있으니 읽는 것에는 문제없지만 처음 접하는 문구들과 평소 일상에서 사용하던 언어와는 좀 차이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긴장감이 있는 상태였고 나름 눈치 껏 목소리 톤과 속도를 조절해 가며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후 법회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더불어 매일 진행되는 온라인 수행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예불문을 독송할 기회가 자주 있게 되었고, 예불문에 실린 문구들은 말과 글로써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 삶으로 스며들었다. 예를 들면, 어떤 하루를 보냈더라도 저녁 수행에 참여해 삼귀의와 오계를 읽으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또한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자연스레 가르마가 타진다. 이러다 보니 어느 날에는 문득 예불문이 참 좋은 친구라고 생각되었다.
좋은 친구는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위로하며 편안하게 하고 그 스스로 바른 길로 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친구인 나도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처럼 예불문이 나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고 상가의 보호를 받듯 예불문 또한 곁에 있는 좋은 친구로 나를 보호한다.
지난 봄에는 일본에 잠깐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여유 시간이 있어 숙소에서 가까운 사찰 몇 곳을 방문했었다. 불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한국에서도 사찰이라고 하는 곳을 방문한 것은 한참 사람들과 어울려 등산 다닐 때 목적지인 산 아래에 있는 사찰에 가본 것이 다였던 터다.
몇 곳의 사찰 중 도초지(東張寺)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크다는 목조 좌불 앞에 섰을 때의 일이다. 불상을 바라보며 합장하였는데 나도 모르게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를 읊조리며 부처님께 경배를 올린 것이다. 관람하던 일본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함께 간 아들도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부처님께 경배드리는 문구라고 말해주는데 마음이 경건했고 뿌듯함이 차올랐었다.
지난주 수요 수행에서는 자애 게송 독송 중 ‘모든 중생, 고통에서 벗어나기를’하고 소리 내어 읽는데 마음이 뭉클했다. 순간 참 감사하고 행복함이 일어났는데 예불문을 독송할 때면 이런 뭉클함을 자주 경험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쩌다 인연이 되어 처음 수행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도 있을 때면 짧은 소견이지만 예불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곁에 두면 좋은 친구를 그들도 알았으면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