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수행법 - 사마타와 위빠사나>
디가니까야(장부경)와 맛지마니까야(중부경)의 마하사띠빠따나 숫따(대념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오온(몸과 마음)을 분명하고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청정히 하고 슬픔과 괴로움, 고뇌와 한탄, 비탄을 소멸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소멸하는 도(道)와 과(果)를 얻기 위해서, 더 나아가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는 닙바나에 들어서기 위해선 몸과 마음의 성품을 관찰하여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일의 한 철학자가 개인의 견해로 지구에서 위대한 성인 네 분을 꼽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서양과 동양 각각 두 명이었는데, 서양인은 예수와 소크라테스였고 동양인으로는 공자와 붓다였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성인과 훌륭한 철학자들이 있고 훌륭한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성인과 훌륭한 철학자와 과학자 중에서 누구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이야기해준다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신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병듦과 늙음과 죽음마저 초월하고 극복할 방법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붓다께서 바라나시 이시빠타나의 미가다야(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비구에게 첫 법문 하셨을 때 그 자리의 비구들 역시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 붓다처럼 윤회에 들지 않고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며칠 사이에 제자들이 늘어나 첫 번째 전법 여행을 떠났던 야사와 60명의 청년 또한 늙음과 죽음과 병듦의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렇게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이천육백 년이 흐르는 동안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붓다께서는 ‘나’를 향상할 수 있는 두 가지 수행 방법 중 집중만 일어나는 사마타 수행법만 있던 세상에 지혜가 일어나는 위빠사나 수행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걱정, 근심, 초조함, 불안, 성냄, 탐욕, 의심, 무기력함, 후회, 감각적 욕망 등이 끊임없이 ‘나’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나’를 우리가 분명하게 바라볼 힘이 없을 때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또는 관심을 돌리든지 집중의 힘으로 그것을 눌러 놓아야만 합니다. 이렇듯 ‘나’를 잠시 잊을 수 있는 수행법을 한자로는 ‘그칠 지(止)’ 또는 ‘모을 정(定)’을 쓰고, 사마타 수행이라고 합니다. 사마타 수행법은 선정을 목표로 하며, 붓다가 되기 전에 익혔던 수행법입니다. 하지만 이 사마타 수행법으로는 지혜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힘듦, 고난, 장애, 어려움 등이 있을 때 상황을 피하거나 누르지 않고 맞닥뜨려서 그대로 보고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자로 ‘총명하다’, ‘사리에 밝다’는 의미의 ‘혜(慧)’, ‘관(觀)’을 쓰고, 붓다께서 쓰셨던 빨리어로는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내 주관적 입장에서 보지 않고 오온이 가진 속성 그대로 보는 수행입니다.
<두 종류의 수행법 - 사마타와 위빠사나>
디가니까야(장부경)와 맛지마니까야(중부경)의 마하사띠빠따나 숫따(대념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오온(몸과 마음)을 분명하고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청정히 하고 슬픔과 괴로움, 고뇌와 한탄, 비탄을 소멸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소멸하는 도(道)와 과(果)를 얻기 위해서, 더 나아가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는 닙바나에 들어서기 위해선 몸과 마음의 성품을 관찰하여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일의 한 철학자가 개인의 견해로 지구에서 위대한 성인 네 분을 꼽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서양과 동양 각각 두 명이었는데, 서양인은 예수와 소크라테스였고 동양인으로는 공자와 붓다였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성인과 훌륭한 철학자들이 있고 훌륭한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성인과 훌륭한 철학자와 과학자 중에서 누구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이야기해준다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신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병듦과 늙음과 죽음마저 초월하고 극복할 방법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붓다께서 바라나시 이시빠타나의 미가다야(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비구에게 첫 법문 하셨을 때 그 자리의 비구들 역시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 붓다처럼 윤회에 들지 않고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며칠 사이에 제자들이 늘어나 첫 번째 전법 여행을 떠났던 야사와 60명의 청년 또한 늙음과 죽음과 병듦의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렇게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이천육백 년이 흐르는 동안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붓다께서는 ‘나’를 향상할 수 있는 두 가지 수행 방법 중 집중만 일어나는 사마타 수행법만 있던 세상에 지혜가 일어나는 위빠사나 수행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걱정, 근심, 초조함, 불안, 성냄, 탐욕, 의심, 무기력함, 후회, 감각적 욕망 등이 끊임없이 ‘나’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나’를 우리가 분명하게 바라볼 힘이 없을 때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또는 관심을 돌리든지 집중의 힘으로 그것을 눌러 놓아야만 합니다. 이렇듯 ‘나’를 잠시 잊을 수 있는 수행법을 한자로는 ‘그칠 지(止)’ 또는 ‘모을 정(定)’을 쓰고, 사마타 수행이라고 합니다. 사마타 수행법은 선정을 목표로 하며, 붓다가 되기 전에 익혔던 수행법입니다. 하지만 이 사마타 수행법으로는 지혜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힘듦, 고난, 장애, 어려움 등이 있을 때 상황을 피하거나 누르지 않고 맞닥뜨려서 그대로 보고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자로 ‘총명하다’, ‘사리에 밝다’는 의미의 ‘혜(慧)’, ‘관(觀)’을 쓰고, 붓다께서 쓰셨던 빨리어로는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내 주관적 입장에서 보지 않고 오온이 가진 속성 그대로 보는 수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