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의 목적
육체적 건강이 무엇인지 누군가 질문 한다면 ‘어떠한 질병도 없고, 별다른 몸의 장애 없이 편안하게 살면서 활동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럼 정신적 건강이란?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부정적인 정신 상태가 소멸한 상태’가 완전히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건강이란 ‘어떤 부정적인 상태를 제거하여 얻는 독립적인 상태’ 입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조용히 혼자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는, 부정적인 상황이 제거됐을 때 오는 상태’가 평화인 것처럼 위빠사나 수행 또한 부정적인 정신 상태인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전부 소멸 시킬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불선업의 심리적인 요소까지 완전히 제거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수행의 또 다른 정의를 내리면, 수행이란 둑카(불만족, 정신적 고통, 육체적 괴로움 등)를 소멸한 자유로움입니다. 자유로움이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지워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몸과 마음은 조건 지워집니다. 이들은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집착의 마음은 한번 경험한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은 항상 변화하고 조건 지워진 것을 움켜쥐기에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고통에서 자유로우려면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야 합니다.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가 일어나는 단계(지점)입니다.
3. 지혜 계발하기 (ditthi-visuddhi:위빠사나 수행)
● 사마타에서 ‘위빠사나’로 넘어가기
“여기 유일한 길이 있다. 중생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아픔(육체적)과 고뇌(정신적)를 사라지게 하고, 숭고한 길(팔정도, 도)에 도달하고, 열반(닙바나)을 실현하니, 즉,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 대념처경 -
우리가 흔히들 정상은 하나지만, 올라가는 길은 여러 길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방향이건 오르면 정상에 도달한다 합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모든 괴로움(번뇌)을 소멸하는 길은 단 한 길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수행법으로는 절대로 천 오백 개의 번뇌를 소멸하지 못한다고 이천육백 년 전에 단호하고 확고(에카야노막고)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단 하나의 길(방법)이란?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 즉 신수심법에 알아차림(사띠)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현상이 찰나도 항상하지 않기에 괴로움이며 이런 것에 자아가 없음을 몸과 마음에서 경험할 때, 수행자들은 관념적인 지식을 넘어 궁극적인 진리를 알게 되며 ‘나’, ‘나라고 할 만한 것', ‘어떤 존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으며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란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신적 과정과 육체적 과정의 작용만이 존재함을 알게 됩니다. 무상, 고, 무아가 일어나고 자라고 풍부해지고 융성해지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법입니다. 달리 말하면 수행을 통해 위빠사나 지혜가 생기고 발전하고 많아지고 더욱 커지게 됩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서 점차 발전하는 것을 수행의 지혜라고 합니다. 그 지혜는 오직 수행을 통해 생기며 정신적 계발 즉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위빠사나 수행이란?
위빠사나 수행이란 바른 말, 바른 행위로 몸을 다스리고, 이를 바탕으로 바른 견해가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보아 몸과 마음에 ‘자아’, ‘나’라는 잘못된 견해가 붙지 않아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나’, ‘자아’, ‘영혼’이라는 개념이나 관념 대신 실재인 단지 물질적 과정과 정신적 과정의 성품밖에 없음을 알고 마음을 청정히 해야 합니다. 수행으로 망각, 기쁨, 환희, 황홀, 즐거움, 고요함 등을 얻고자 함은 갈애와 집착입니다. 이러한 갈애와 집착은 자유로움을 더욱 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지혜 없는 개는 똥을 보면 즐겁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데 똥이 더럽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더럽기에 깨끗이 하지 못합니다. 오직 바르고 깨끗한 것 만으로 더러움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과 삶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신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은 항상 바깥으로 향하여 소리·냄새·맛이 있으면 마음은 즉시 소리·냄새·맛을 따라갑니다. 이때 상상·착각·왜곡·전도가 일어나 자기 자신(존재와 현재를 망각)을 잊어버리거나 잘못된 견해가 일어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러한 습성과 반대로, 바깥을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 마음이 현재에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수행은 통찰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가게 하고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게 합니다.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실재인 몸과 마음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게 하기에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게 합니다. 이는 타인에게도 유익한 영향으로 바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이타적인 삶으로 이끕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자신의 탐욕·성냄·어리석음을 극복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한 그 힘은 다른 사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으므로 위빠사나 수행의 삶은 진정한 이타적인 삶입니다.
● 수행의 목적
육체적 건강이 무엇인지 누군가 질문 한다면 ‘어떠한 질병도 없고, 별다른 몸의 장애 없이 편안하게 살면서 활동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럼 정신적 건강이란?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부정적인 정신 상태가 소멸한 상태’가 완전히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건강이란 ‘어떤 부정적인 상태를 제거하여 얻는 독립적인 상태’ 입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조용히 혼자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는, 부정적인 상황이 제거됐을 때 오는 상태’가 평화인 것처럼 위빠사나 수행 또한 부정적인 정신 상태인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전부 소멸 시킬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불선업의 심리적인 요소까지 완전히 제거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수행의 또 다른 정의를 내리면, 수행이란 둑카(불만족, 정신적 고통, 육체적 괴로움 등)를 소멸한 자유로움입니다. 자유로움이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지워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몸과 마음은 조건 지워집니다. 이들은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집착의 마음은 한번 경험한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은 항상 변화하고 조건 지워진 것을 움켜쥐기에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고통에서 자유로우려면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야 합니다.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가 일어나는 단계(지점)입니다.
3. 지혜 계발하기 (ditthi-visuddhi:위빠사나 수행)
● 사마타에서 ‘위빠사나’로 넘어가기
“여기 유일한 길이 있다. 중생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아픔(육체적)과 고뇌(정신적)를 사라지게 하고, 숭고한 길(팔정도, 도)에 도달하고, 열반(닙바나)을 실현하니, 즉,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 대념처경 -
우리가 흔히들 정상은 하나지만, 올라가는 길은 여러 길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방향이건 오르면 정상에 도달한다 합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모든 괴로움(번뇌)을 소멸하는 길은 단 한 길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수행법으로는 절대로 천 오백 개의 번뇌를 소멸하지 못한다고 이천육백 년 전에 단호하고 확고(에카야노막고)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단 하나의 길(방법)이란?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 즉 신수심법에 알아차림(사띠)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현상이 찰나도 항상하지 않기에 괴로움이며 이런 것에 자아가 없음을 몸과 마음에서 경험할 때, 수행자들은 관념적인 지식을 넘어 궁극적인 진리를 알게 되며 ‘나’, ‘나라고 할 만한 것', ‘어떤 존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으며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란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신적 과정과 육체적 과정의 작용만이 존재함을 알게 됩니다. 무상, 고, 무아가 일어나고 자라고 풍부해지고 융성해지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법입니다. 달리 말하면 수행을 통해 위빠사나 지혜가 생기고 발전하고 많아지고 더욱 커지게 됩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서 점차 발전하는 것을 수행의 지혜라고 합니다. 그 지혜는 오직 수행을 통해 생기며 정신적 계발 즉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위빠사나 수행이란?
위빠사나 수행이란 바른 말, 바른 행위로 몸을 다스리고, 이를 바탕으로 바른 견해가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보아 몸과 마음에 ‘자아’, ‘나’라는 잘못된 견해가 붙지 않아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나’, ‘자아’, ‘영혼’이라는 개념이나 관념 대신 실재인 단지 물질적 과정과 정신적 과정의 성품밖에 없음을 알고 마음을 청정히 해야 합니다. 수행으로 망각, 기쁨, 환희, 황홀, 즐거움, 고요함 등을 얻고자 함은 갈애와 집착입니다. 이러한 갈애와 집착은 자유로움을 더욱 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지혜 없는 개는 똥을 보면 즐겁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데 똥이 더럽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더럽기에 깨끗이 하지 못합니다. 오직 바르고 깨끗한 것 만으로 더러움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과 삶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신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은 항상 바깥으로 향하여 소리·냄새·맛이 있으면 마음은 즉시 소리·냄새·맛을 따라갑니다. 이때 상상·착각·왜곡·전도가 일어나 자기 자신(존재와 현재를 망각)을 잊어버리거나 잘못된 견해가 일어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러한 습성과 반대로, 바깥을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 마음이 현재에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수행은 통찰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가게 하고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게 합니다.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실재인 몸과 마음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게 하기에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게 합니다. 이는 타인에게도 유익한 영향으로 바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이타적인 삶으로 이끕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자신의 탐욕·성냄·어리석음을 극복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한 그 힘은 다른 사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으므로 위빠사나 수행의 삶은 진정한 이타적인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