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몸(물질)과 마음의 성품을 알아 집착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반복하여 말하면 반드시 ‘베풂·지계·집중·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첫 단계 : 학습과 배움 (듣고, 읽고, 베풀고, 도덕적 생활)
(수행을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모든 잘못된 행위를 하지마라(Sabbāpapassa akaraṇam)”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지혜를 일으키는 위빠사나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탐욕·성냄·어리석음, 불선업에서 멀어져 자유롭게 살기 위해선 반드시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가볍게 여기고 진정 실천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과 불선, 행복과 불행의 원인은 잘못된 생각, 말, 행위에서 비롯합니다. 탐욕과 성냄이 기승을 부릴 때 가장 먼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갈등, 이해, 다툼, 불신, 자책, 낮은 자존감, 범죄 등은 결국 잘못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말과 행위를 잘 통제할 수 있습니다. 크든 작든 생각·말·행위로 짓는 모든 잘못된 행위를 끊는 것이 자유로운 삶(수행)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작은 먼지가 손바닥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지만, 눈에 들어가면 눈물을 흘리고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잘못된 생각·말·행위 대신 유익한 행위 만을 실천하여 바른 생각·말·행위로 어떠한 잘못된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자유로움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올바른 것을 기억하고 알아차림을 지녀야 합니다. 수행하는 것은 상대방이나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힘으로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을 변화시켜 자유로워지자는 것입니다.
㉡ 중간 단계 : 실천수행 (사마타와 위빠사나)
마음은 진동하고 흔들립니다. 마음은 ‘형태·소리·냄새·맛·감촉·법’에 흔들리는 성질을 갖습니다. 빠른 속도의 말은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겨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산란하고 산만하고 방황하는 마음은 달리는 말의 꼬리처럼 잡기 어렵습니다.
마음은 잠재의식과 마음의 진행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을 ‘에깍가따’라 하는데 이는 집중(사마디)의 상태입니다. 산란하고 산만한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집중인데, 마음은 집중(사마디, 에깍가따)되지 않으면 통제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마음은 한 대상에 두자마자 재빠른 말처럼 머리, 다리, 집, 직장, 바깥으로 순간 달아납니다. 그런 후, 망아지처럼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지요. 집중의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면 고통과 불선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선업과 자유로움은 마음을 통제하는 다스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 마지막 단계 : 실제적인 열매 (자유로움)
알아차림(사띠)이 확립되어 마음이 청정해지면 주시하는 대상(물질)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구별됩니다. 걸을 때 걷는 감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구별됩니다. 발을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도록 하는 마음이 구분됩니다. 앎의 대상인 물질로부터 앎인 정신이 저절로 구별하게 됩니다. 집중력이 더욱 높아져 지혜의 힘이 강해지면 팔을 굽히고자 의도하기에 팔이 굽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모든 현상과 관련된 원인과 결과로 구별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한순간 생긴 아는 주체와 그 앎의 대상인 객체가 다음 순간까지 가지 못하고 바로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은 빠르게 생겨났다가 곧바로 사라집니다. 모든 실체가 빠르고 쉽게 변하는 무상(아닛짜)과 불만족(둑카)을 알아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완전한 자유로움은 우리가 사용하는 관습적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관습적인 언어란, 관습적인 인간이 관습적인 개념으로 사회의 관습적인 약속으로써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능, 마음, 대상 세 가지가 다 조건 지어진 것이기에 조건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언어로 자유로움(열반)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몸(물질)과 마음의 성품을 알아 집착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반복하여 말하면 반드시 ‘베풂·지계·집중·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첫 단계 : 학습과 배움 (듣고, 읽고, 베풀고, 도덕적 생활)
(수행을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모든 잘못된 행위를 하지마라(Sabbāpapassa akaraṇam)”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지혜를 일으키는 위빠사나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탐욕·성냄·어리석음, 불선업에서 멀어져 자유롭게 살기 위해선 반드시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가볍게 여기고 진정 실천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과 불선, 행복과 불행의 원인은 잘못된 생각, 말, 행위에서 비롯합니다. 탐욕과 성냄이 기승을 부릴 때 가장 먼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갈등, 이해, 다툼, 불신, 자책, 낮은 자존감, 범죄 등은 결국 잘못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말과 행위를 잘 통제할 수 있습니다. 크든 작든 생각·말·행위로 짓는 모든 잘못된 행위를 끊는 것이 자유로운 삶(수행)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작은 먼지가 손바닥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지만, 눈에 들어가면 눈물을 흘리고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잘못된 생각·말·행위 대신 유익한 행위 만을 실천하여 바른 생각·말·행위로 어떠한 잘못된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자유로움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올바른 것을 기억하고 알아차림을 지녀야 합니다. 수행하는 것은 상대방이나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힘으로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을 변화시켜 자유로워지자는 것입니다.
㉡ 중간 단계 : 실천수행 (사마타와 위빠사나)
마음은 진동하고 흔들립니다. 마음은 ‘형태·소리·냄새·맛·감촉·법’에 흔들리는 성질을 갖습니다. 빠른 속도의 말은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겨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산란하고 산만하고 방황하는 마음은 달리는 말의 꼬리처럼 잡기 어렵습니다.
마음은 잠재의식과 마음의 진행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을 ‘에깍가따’라 하는데 이는 집중(사마디)의 상태입니다. 산란하고 산만한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집중인데, 마음은 집중(사마디, 에깍가따)되지 않으면 통제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마음은 한 대상에 두자마자 재빠른 말처럼 머리, 다리, 집, 직장, 바깥으로 순간 달아납니다. 그런 후, 망아지처럼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지요. 집중의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면 고통과 불선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선업과 자유로움은 마음을 통제하는 다스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 마지막 단계 : 실제적인 열매 (자유로움)
알아차림(사띠)이 확립되어 마음이 청정해지면 주시하는 대상(물질)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구별됩니다. 걸을 때 걷는 감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구별됩니다. 발을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도록 하는 마음이 구분됩니다. 앎의 대상인 물질로부터 앎인 정신이 저절로 구별하게 됩니다. 집중력이 더욱 높아져 지혜의 힘이 강해지면 팔을 굽히고자 의도하기에 팔이 굽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모든 현상과 관련된 원인과 결과로 구별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한순간 생긴 아는 주체와 그 앎의 대상인 객체가 다음 순간까지 가지 못하고 바로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은 빠르게 생겨났다가 곧바로 사라집니다. 모든 실체가 빠르고 쉽게 변하는 무상(아닛짜)과 불만족(둑카)을 알아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완전한 자유로움은 우리가 사용하는 관습적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관습적인 언어란, 관습적인 인간이 관습적인 개념으로 사회의 관습적인 약속으로써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능, 마음, 대상 세 가지가 다 조건 지어진 것이기에 조건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언어로 자유로움(열반)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