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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바라밀 - 청정한 삶을 위한 가르침

2012-06-06

 부처님께서는 이천 육백년 전에 붓다가 되셨지만, 그 시절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까지는 많은 세월 동안 해야 될 것들이 있었습니다. 우선은 내가 붓다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그냥 일을 해서 바로 성취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라면 하나를 끓이더라도 라면을 끓여야겠다, 라면이 어디 있나? 물을 얼만큼 해야겠다, 불을 얼만큼 해야 하나?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라면이 끓여지게 되죠.


 이렇듯 어떠한 일을 할 때 그 일이 크고 중요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숙고를 하게 되죠. 역시 붓다가 되기 전에 그 전신의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부처님게서 처음으로 붓다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에는 연유가 있었죠.


 부처님이 전생에 공주로 태어난 시절에, 오빠가 왕자였는데 그 분이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이 때 아버지인 왕이 부처님에게 공양할 수 있는 공덕을 모두 독차지했고, 심지어는 법문도 혼자서 독차지했습니다. 이것을 본 여동생인 부처님께서는 다음에 내가 붓다가 되면 저렇지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덕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법문을 해줄 것이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이 때가 처음으로 내가 붓다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때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십육아승지겁*주) 동안 붓다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 후 팔아승지겁 동안은 내가 붓다가 돼야겠다는 것을 좀 더 구체화시키는 과정으로 한 생도 빠짐없이 붓다가 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 후에 수메다라는 청년의 몸으로 딥방가 부처님을 뵙고 난 뒤에 윤회의 고통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많은 중생들을 가엽게 여기고 자기의 능력 또한 믿는 마음에서 붓다의 서원을 가졌죠. 이때 딥방가 부처님께서는 이 수메다의 먼 미래를 생각해보시고 이 수행자는 사아승지겁과 십만의 우주가 지나고 나서 고타마 붓다라는 이름으로 나와 같은 붓다가 될것이다라는 거룩한 수기를 내려주게 되었죠.


 이렇게 처음으로 수기를 받은 것이 수메라라는 재가자 장자로 있을 때입니다. 그 후에 이 수메다는 선업공덕, 바라밀을 닦았죠. 바라밀이라는 것 은 무엇이냐? 마음을 높고 고상하게 가지는, 즉 닙바나를 향하는 보시 지계 등의 선업을 말하는 것이죠.



● 열 가지 바라밀


 여러분들이 수행을 했을 때 수행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즉,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의 지금 상태가 어떤 것이고, 그 상태에서 올바른 쪽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 순탄하지가 않습니다. 왜 순탄하지가 않죠? 우선은 몸이 힘듭니다. 수행할 수 있는 그 몸이 힘듭니다. 심지어 어떤 수행자는 내가 가서 노동판에서 노동하는 것이 낫지, 가만히 앉아 있고 가만히 걷는 것이 힘들다고 하죠. 또한 이 몸보다 더 힘든 것이 마음이죠. 마음이 책에서 보거나 법문에서 들으면 많은 현상 체험을 쉽게 할 수 있고 마음이 안정되고 평온하고 더 깊이는 아주 고요한 곳으로 갈 수가 있다고 하는데, 내가 직접 해보니까 그렇지 못하죠. 자, 수행을 할 수 있으려면 몸도 건강해야 하지만,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그 마음은 좋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즉 좋은 마음의 상태가 수행을 하게 해주죠. 여기서 수행을 하게 해준다는 것은 나라고 생각하는 몸과 마음, 즉 오온을 오온의 자체 성품으로 보게 해준다는 것이죠. 그러나 선한 마음을 갖지 않았을 때는 수행을 하지 못하게 되죠. 역시 부처님도 그런 것을 아셨기 때문에 붓다가 되기 전생에 열 가지 선업, 즉 바르고 유익하고 선한 마음을 행위와 말과 생각으로써 닦았던 것입니다.


 그 열 가지는 어떤 것이냐?


 제일 첫 번째가 단아 바라밀, 즉 보시 바라밀입니다.

 보시를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의 탐욕을 줄이는 것이고, 보시를 행함으로써 상대에 대해 배려를 갖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실라 바라밀, 즉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계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 계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굳은 마음과 올바른 판단과 또한 지키고자 하는 노력과, 지키는 것에 대한 유혹을 참을 수 있는 참을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또한, 계를 지키는 사람보다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을 쫓아가지 않고 옳은 것을 쫓아가고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굳건함 또한 필요한 것이 계인 것이죠.


 세 번째는 메캄마 바라밀, 즉 포기하는 것입니다.

 재산과 부귀가 덧없는 것을 알고 쫓아가지 않는 것이 메캄마입니다.


 네 번째 바라밀은 빤야 바라밀, 지혜의 바라밀입니다.

 여러 가지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 이 빤야 바라밀 또한 두둑하게 쌓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위리야 바라밀, 즉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진력인데, 여기서는 무엇에 대해서 정진하고 노력해야 하느냐. 선업하는 것에 대해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노력하는 것을 말하게 되죠. 다른 것을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선업에서 벗어나지 않고, 선업이 작아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 위리야 바라밀인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깐띠 바라밀, 참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는 것이라는 것은 내적, 외적인데, 외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혔을 때 그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내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들이 일어나게 됐을 때 이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서 참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 다른 사람들이 괴롭히는 것에 대해서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바라밀은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서 생활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 이 깐띠 바라밀을 해나가는 것이 알아차림을 둔다, 다른 무엇을 한다는 것보다도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이 우빽카, 평정심에서 흔들리지 않게 해주게 되죠.


 외적으로 사람들은 나를 괴롭힙니다. 물론 괴롭힌다고 했을 때는 내 주관적인 것이 될 수가 있죠. 이 외적인 괴롭힘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진실된 괴로움이 있고, 또 하나는 진실되지 않은 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자, 상대가 나의 약점과 허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을 때 내가 괴로움을 갖게 됩니다. 또한, 상대가 나의 약점과 허물이 아닌 것을 잘못 보고서 이야기를 해준 것 또한 나에게 괴로움이 되죠. 그러나 우리는 같은 괴로움이라도, 전자, 나의 약점과 허물에 대해서 정말로 괴로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괴로워한다는 것은 내가 거기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과소평가해서 자책하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러한 것을 다시 갖지 않아야겠다.’는 쪽으로써 괴로워하라는 것이죠.


 괴로운 것이 좋은가요? 싫습니다. 나도 싫습니다. 그러면 이 싫은 것을 하지 않고 이러한 괴로움을 다시 만나지 않으려면, 이러한 것에 기회를 주지 않으려면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하지 말아야만 하죠. 이런 쪽에서 여러분들은 전자를 택하라는 것이죠. 후자, 즉 상대가 나에 대해서 바르게 보지 않고서 괴롭히는 것,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괴로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괴로움을 갖는 것, 그것은 여러분들이 잘못된 견해(사카야 디티)를 많이 갖게 되면 후자에 대해서도 괴로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견해, 없는 나를 여러분들이 자꾸 내세우게 되는 것이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그냥 흘려버리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상대방에 대해서 ‘아, 저 수행자가 지금은 저렇게 말하지만, 이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오히려 후회할 것이다.’ 또한, ‘저렇게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저 수행자가 측은하게 보인다’ 이렇게 볼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삿짜 바라밀, 진실된 바라밀입니다.

 내가 정직하게 말하고 행위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 바르게 또한 정직하게 행할 수 있는 것도 매우 귀중한 바라밀이 되는 것이죠. 사람과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요? 내가 이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내가 이 사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가 흔히들 말하죠.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사람을 사귀는 것이 낫고, 만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그 한 사람의 삶을 들어보는 것, 이것이 더 낫다고 말이죠.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죠.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의 간격이 어떻죠? 서로 벽이 있고, 또 사람과 사람이 어떻죠? 다 외로운 섬들이죠? 뚝뚝뚝뚝 떨어진 섬들이죠. 그러니까 구조적으로 아파트가 붙어있지만 다 각각이지 않습니까? 왜 각각이죠? 이 삿짜, 진실에 대한 것이 모자라기 때문에, 정직하게 말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 모자라기 때문에 서로를 믿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서울에 사람들이 많지만 어떻습니까? 복잡해지기만 하고, 서로 짜증이 나고, 저녁이 되면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주게 되죠.


 여덟 번째 바라밀은 아딧타나 바라밀입니다.

 아딧타나 바라밀이란 것은 자기가 목적한 선업에 대해서 주춤거리지 않고 용맹스럽고 용감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용감하고 결단력 있게 어떤 것을 하는 것이 많지는 않지만, 다른 것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선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용감하고 용맹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것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알게되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이 여러분들의 생활에서, 더 나아가서는 여러분들이 지금의 자신의 상태를 잘 보고자 하는데 직접적인 힘으로 작용을 하기 때문이죠.


 아홉 번째가 메타 바라밀, 자애 바라밀입니다.

 자애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매우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도 이 자애와 지혜, 이것이 균형을 갖도록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애만 있는 사람은 자칫하면 이성이 감소된 감성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가슴만 뜨거워지고, 또한 자애가 없이 지혜만 있는 사람은 감성이 없는 이성으로서만 나가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가슴과 머리가 같이 뜨거워지고, 서로 같이 도움을 주고 의지하게 됐을 때 그것은 큰 활력이 되죠. 그런 쪽에서 이 자애는 우리들의 마음을 넓게 열어주는 그런 쪽의 마음입니다.

 다른 마음들은 내 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자애의 마음은 나를 통해서 우리 집안, 내가 살고 잇는 마을, 나라, 국가, 우주까지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자칫 수직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나나 그 사람이나 똑같이 보게 되고, 또 나나 그 사람이나 똑 같은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 수평적인 사고방식으로 갖게 해 주는 것, 즉, 한없이 뻗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애의 마음인 것이죠. 다른 마음도 멀리 갈 수 있지만 이 자애의 마음 만큼은 가지를 못합니다.


 또한, 불교에서 89가지의 마음들이 있지만, 이것은 거의 다 자기의 몸에 머물게 되죠. 그러나 이 자애의 마음만큼은 몸을 떠나게 됩니다. 이 자애의 마음보다 더 멀리 가는 마음이 있죠? 무슨 마음이죠? 그것이 연민의 마음, 까루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자애의 마음보다 더 멀리 가고 더 감싸고 껴안을 수 있는 힘이 있죠. 이 연민의 마음보다 더 멀리 가고 더 부드럽고 더 많이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 무엇이죠? 바로 무디따. 같이 기뻐하는 마음이죠. 다른 사람이 잘 됐을 때 내 기쁨처럼 같이 기뻐하는 마음. 이 무디따보다 더 멀리 가고 더 부드럽고 더 껴안을 수 있는 마음, 마치 공중에 걸려 있는 그물이 바람이 불어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바람이 다 빠져나가듯이 모든 것을 빠져나가게 해주는 마음이 뭐죠? 바로 우빽카, 평정의 마음이죠.


 열 번째는 우빽카 바라밀입니다.

 여기에서 우빽카라는 것은 내가 좀 전에 말했던 우빽카도 될 수 있지만, 우선은 내가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양극단으로 갈 수 있는 마음을 떠나는 마음, 즉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자애가 평등하게 볼 수 있는 것과는 조금 틀립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자애가 평등하게 볼 수 있는 것은 한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평등하게 볼 수 있는 우빽카의 마음, 이것은 자애의 마음보다 몇 배, 몇십 배 더 큰 평등의 마음인 것이죠. 그래서 우빽카가 있을 때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나에게 왕위를 준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왕위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나에게 행복을 준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지도 않고, 행복을 가져간다고 하더라고 흔들리지 않는, 이 만큼의 평등한 마음인 것이죠.


2004년 12월 31일 동안거 법문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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