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남 옮김
<마음에 관하여>
마음에 관해서 말하자면, 사실 어떤 것도 완전히 틀린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순수합니다. 마음 자체는 이미 평화로운 것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다고 함은 마음이 처해 있는 정황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마음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본래 품성의 한 측면 일 뿐입니다. 우리는 정황이나 조건이 마음을 속이 기 때문에 평화롭기도 하고, 동요하기도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어리석습니다. 감각의 대상이 오면 마음을 속여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고통, 기쁨, 슬픔 등이 있습니다만, 마음의 참 본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나 슬픔은 마음이 아니라 우리를 기만하러 오는 일종의 ‘분위기’ 같은 것입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길을 잃고, 그러한 것들을 따릅니다. 그리고는 마음 자체를 망각하고, 급기야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화가 났다거나, 편안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들의 마음은 이미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고요합니다. 정말 평화롭게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한 있는 그대로 있는 나뭇잎처럼 말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휘날립니다. 그 흔들림은 바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흔들림은 그러한 감각대상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은 그것들을 쫓아갈 뿐입니다. 만약 마음이 그것들을 쫓지 않으면,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무관심한 감각 현상의 본질을 명확히 알게 되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우리의 훈련은 마음의 본래 품성을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감각 현상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감각대상들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훈련 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힘들게 매진하는 목표인 것입니다.
<수행에 관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은 올바른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마음을 너무 심하게 억누른다면, 마음은 오히려 멀리 달아납니다. 그런데 또 충분히 노력하지 않으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너무 억누르지도 너무 느슨하게도 놔두지 않는 중도의 균형이 필요한 것입니다.
대개 마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항상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마음을 활기차게 하는 것과 몸을 활기차게 하는 것과는 서로 다릅니다. 몸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우리는 운동을 해야 하고, 또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터프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마음을 강하게 한다는 것은 평화로워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저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결코 평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결코 ‘사마디’(수행훈련으로 얻어지는 고요하게 집중하는 상태)의 에너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정의 울타리 안에 머물도록 잘 감시해야 합니다. 깨어있음을 유지하며 앉아서 좌선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호흡을 너무 길게 혹은 너무 짧게 내쉰다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마음은 평화로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페달 달린 재봉틀을 처음 사용할 때와 같습니다. 실제로 재봉 바느질을 하기 전에 처음엔 그저 페달을 잘 밟는 연습을 하여 기계가 균일하게 돌아가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숨을 따라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길게 쉬거나 짧게 쉬거나 혹은, 숨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간에 처음엔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십시오. 그냥 내버려두어, 자연스런 호흡을 쫓아가도록 하십시오.
숨이 고르게 되면 우리는 호흡을 수행의 대상으로 잘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숨의 처음은 코끝에서 시작되며, 가슴을 거쳐 아랫배에서 들이마시기의 행위가 끝납니다. 이것이 호흡의 경로입니다. 숨을 내쉴 때, 처음은 아랫배에서 시작되어 가슴을 거쳐 코끝에서 내쉬기의 행위가 끝이 납니다. 그저 숨의 경로를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코끝, 가슴, 아랫배, 그리고 아랫배, 가슴, 코끝의 순으로 말입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산란한정신상태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 가지 부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깨어있음과 자각 능력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관찰하는 데에 익숙해지게 되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들이쉬고 내쉬는 그 자체를 바라보게 됩니다. 숨이 들어왔다 나가는 입출구인 코끝이나, 혹은 윗입술에 그저 집중함으로써 말입니다. 호흡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코끝에서 우리 자신의 깨어있음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숨이 들어감-나감, 들어감-나감, 하는 형식으로 호흡을 관찰하십시오. 어떤 특별한 것도 생각할 필요없이 ‘현재’의 이 ‘단순작업’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생생한 깨어 있음을 유지하면서 말입니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 이외에 어떠한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하면, 마음은 금방 고요해질 것이며, 호흡은 매끄러워질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가벼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을 위한 올바른 상태입니다. 앉아서 수행을 하게 되면 마음은 맑아집니다. 그러나 어떤 상태에 놓여있든, 우리는 그 상태를 명료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활발한 정신작용은 고요함과 함께합니다. 마음을 일정 주제에의 집중으로 이끌어 주는‘Vitakka’라는 것이 있습니다. 깨어있음이 강하지 못하면 그만큼Vitakka도 약하게 됩니다.그 다음엔, 일정 주제를 둘러싼 조건에 대한 숙고를 가리키는 ‘Vicara’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미약한 정신적 느낌이나 기분들이 때때로 일어날지도 모릅니다만, 우리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일어나건, 그저 그것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의식 저편으로 깊게 들어감에 따라, 마음이 달아나지 않고 단단하게 집중되어 있건 그렇지 못했건 간에 우리는 끊임없이 현재의 수행상태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집중(사마디)과 알아차림(사띠)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거나, 어떠한 기분이나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첫 단계의 고요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다섯 가지 요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Vitakka, Vicara, 그리고 Piti 같은 황홀감과 함께 따라오는 행복감, Sukha입니다. 이 네 가지는 항상 고요한 상태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섯 번째 요소는 하나의 뚜렷한 요소인 ‘ekaggata’입니다. 다른 네 가지 요인이 함께 존재하는 데 어떻게 한 가지만 뚜렷한 요소인가 하는 의구심을 여러분은 가질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네 가지는 ekaggata를 기초로 하는 고요함에서 통일,구현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사마디’라고 합니다. 매일매일 갖게 되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고요함의 요소들입니다. 다섯 가지 특성들이 있지만 결코 고요함의 기초를 해치지는 않습니다. Vitakka가 있지만 결코 마음을 흩뜨려 뜨리지 않고, Vicara, piti 그리고, Sukha가 일어나겠지만, 결코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이러한 요소들과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첫 번째 단계의 고요함이 이와 같습니다.
김형남 옮김
<마음에 관하여>
마음에 관해서 말하자면, 사실 어떤 것도 완전히 틀린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순수합니다. 마음 자체는 이미 평화로운 것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다고 함은 마음이 처해 있는 정황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마음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본래 품성의 한 측면 일 뿐입니다. 우리는 정황이나 조건이 마음을 속이 기 때문에 평화롭기도 하고, 동요하기도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어리석습니다. 감각의 대상이 오면 마음을 속여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고통, 기쁨, 슬픔 등이 있습니다만, 마음의 참 본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나 슬픔은 마음이 아니라 우리를 기만하러 오는 일종의 ‘분위기’ 같은 것입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길을 잃고, 그러한 것들을 따릅니다. 그리고는 마음 자체를 망각하고, 급기야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화가 났다거나, 편안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들의 마음은 이미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고요합니다. 정말 평화롭게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한 있는 그대로 있는 나뭇잎처럼 말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휘날립니다. 그 흔들림은 바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흔들림은 그러한 감각대상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은 그것들을 쫓아갈 뿐입니다. 만약 마음이 그것들을 쫓지 않으면,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무관심한 감각 현상의 본질을 명확히 알게 되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우리의 훈련은 마음의 본래 품성을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감각 현상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감각대상들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훈련 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힘들게 매진하는 목표인 것입니다.
<수행에 관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은 올바른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마음을 너무 심하게 억누른다면, 마음은 오히려 멀리 달아납니다. 그런데 또 충분히 노력하지 않으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너무 억누르지도 너무 느슨하게도 놔두지 않는 중도의 균형이 필요한 것입니다.
대개 마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항상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마음을 활기차게 하는 것과 몸을 활기차게 하는 것과는 서로 다릅니다. 몸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우리는 운동을 해야 하고, 또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터프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마음을 강하게 한다는 것은 평화로워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저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결코 평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결코 ‘사마디’(수행훈련으로 얻어지는 고요하게 집중하는 상태)의 에너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정의 울타리 안에 머물도록 잘 감시해야 합니다. 깨어있음을 유지하며 앉아서 좌선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호흡을 너무 길게 혹은 너무 짧게 내쉰다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마음은 평화로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페달 달린 재봉틀을 처음 사용할 때와 같습니다. 실제로 재봉 바느질을 하기 전에 처음엔 그저 페달을 잘 밟는 연습을 하여 기계가 균일하게 돌아가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숨을 따라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길게 쉬거나 짧게 쉬거나 혹은, 숨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간에 처음엔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십시오. 그냥 내버려두어, 자연스런 호흡을 쫓아가도록 하십시오.
숨이 고르게 되면 우리는 호흡을 수행의 대상으로 잘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숨의 처음은 코끝에서 시작되며, 가슴을 거쳐 아랫배에서 들이마시기의 행위가 끝납니다. 이것이 호흡의 경로입니다. 숨을 내쉴 때, 처음은 아랫배에서 시작되어 가슴을 거쳐 코끝에서 내쉬기의 행위가 끝이 납니다. 그저 숨의 경로를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코끝, 가슴, 아랫배, 그리고 아랫배, 가슴, 코끝의 순으로 말입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산란한정신상태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 가지 부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깨어있음과 자각 능력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관찰하는 데에 익숙해지게 되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들이쉬고 내쉬는 그 자체를 바라보게 됩니다. 숨이 들어왔다 나가는 입출구인 코끝이나, 혹은 윗입술에 그저 집중함으로써 말입니다. 호흡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코끝에서 우리 자신의 깨어있음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숨이 들어감-나감, 들어감-나감, 하는 형식으로 호흡을 관찰하십시오. 어떤 특별한 것도 생각할 필요없이 ‘현재’의 이 ‘단순작업’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생생한 깨어 있음을 유지하면서 말입니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 이외에 어떠한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하면, 마음은 금방 고요해질 것이며, 호흡은 매끄러워질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가벼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을 위한 올바른 상태입니다. 앉아서 수행을 하게 되면 마음은 맑아집니다. 그러나 어떤 상태에 놓여있든, 우리는 그 상태를 명료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활발한 정신작용은 고요함과 함께합니다. 마음을 일정 주제에의 집중으로 이끌어 주는‘Vitakka’라는 것이 있습니다. 깨어있음이 강하지 못하면 그만큼Vitakka도 약하게 됩니다.그 다음엔, 일정 주제를 둘러싼 조건에 대한 숙고를 가리키는 ‘Vicara’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미약한 정신적 느낌이나 기분들이 때때로 일어날지도 모릅니다만, 우리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일어나건, 그저 그것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의식 저편으로 깊게 들어감에 따라, 마음이 달아나지 않고 단단하게 집중되어 있건 그렇지 못했건 간에 우리는 끊임없이 현재의 수행상태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집중(사마디)과 알아차림(사띠)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거나, 어떠한 기분이나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첫 단계의 고요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다섯 가지 요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Vitakka, Vicara, 그리고 Piti 같은 황홀감과 함께 따라오는 행복감, Sukha입니다. 이 네 가지는 항상 고요한 상태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섯 번째 요소는 하나의 뚜렷한 요소인 ‘ekaggata’입니다. 다른 네 가지 요인이 함께 존재하는 데 어떻게 한 가지만 뚜렷한 요소인가 하는 의구심을 여러분은 가질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네 가지는 ekaggata를 기초로 하는 고요함에서 통일,구현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사마디’라고 합니다. 매일매일 갖게 되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고요함의 요소들입니다. 다섯 가지 특성들이 있지만 결코 고요함의 기초를 해치지는 않습니다. Vitakka가 있지만 결코 마음을 흩뜨려 뜨리지 않고, Vicara, piti 그리고, Sukha가 일어나겠지만, 결코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이러한 요소들과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첫 번째 단계의 고요함이 이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