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가르침을 잘 보살피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적 공여를 통한 보살핌입니다. 거기에는 네 가지의 보시가 있는데, 의복, 음식, 주거장소, 그리고 약품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의 상가에 물질적 지원을 해줌으로써 그들이 편안하게 지내면서 불교 수행법을 잘 유지하도록 하여 그 가르침을 보존키 위함입니다. 이러한 지원들은 부처님 가르침이 계속적이고 직접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며 불교라는 종교가 번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나무에 비유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무는 뿌리, 몸통, 가지, 잎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몸통을 포함한 각각의 잎새와 가지들은 영양분을 흡수하고, 또 그 영양분을 윗부분의 다른 부분에 보내주는 ‘뿌리’에 의존하게 됩니다. 나무는 스스로를 지탱해주는 뿌리에 의존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말들은 ‘가지’이고, ‘몸통’입니다. 마음은 그들에게 영양분을 흡수해서 날라주어 열매를 맺도록 해주는 ‘뿌리’입니다.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것은 반드시 옳은 견해 혹은 그릇된 견해에 기반을 두고 있고, 옳은 견해든지 그릇된 견해든지 우리의 말과 행위를 통해 바깥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실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불교를 보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그것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아니죠. 예를 들자면, 수계식을 하는 날에 ‘아잔 스님’께서는 재가자들이 삼가해야 할 서투른 행위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명상하거나 숙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계를 받는다면 진전은 어려울 것이며, 진정한 실천 수행을 통한 확고한 기반마련은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진정한 실천 수행은 보시의 실천 수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계행, 진정한 집중, 그리고 진정한 지혜를 확립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것에 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실천 수행을 통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불교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방대하게 기록된 부처님 가르침, 경전을 모두 배운다 하더라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 재세시에 ‘투코 포틸라(Tuccho Pothila)’라고 불리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경전 학습을 통해 매우 통찰력이 깊었습니다. 그 스님은 18개의 분원이 있는 사원을 가지고 계셨으며, 탁월한 스승이셨습니다. 너무 유명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추앙했습니다. ‘투코 포틸라’라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 위엄에 눌리어 아무도 감히 그가 가르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부처님 재세시에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한 명의 제자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부처님을 찾아 가서 존경의 예를 표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오, 오셨습니까?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이여.”라고 하시곤, 곧 이것 저것에 대해 얼마간 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 계신 곳을 떠나 다시 그가 거처하는 사원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아, 돌아가시게요?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님?.”라고 부처님께서 말하셨습니다. 즉, 말씀하신 것은, 그가 도착했을 때, “오셨습니까?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이여.”라고 한 것과 그가 가려할 때, “아, 돌아가시게요.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님?”이라고 한 두 마디 뿐인 것이었습니다. 이 두 마디가 부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전부였습니다. 투코 포틸라 스님은 탁월한 스승이었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왜 부처님께서 나에게 그 말씀을 하셨을까? 그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고, 계속해서 사색한 끝에, 비로소 “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의 뜻은 수행은 안 하고 오로지 학문적으로 공부만 하는 승려를 말씀하신 거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 보니 정말 일반 재가자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재가자들이 즐기는 것을 자기도 마찬가지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로운 마음을 성취한 이는 그 분 안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수행의 길에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주고, 진정한 평화로움을 제공해 줄 진정으로 수준 높은 깊은 심오함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행을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갈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가 보러 갔던 모든 수행 지도자들이 그의 제자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이 왕년의 스승을 다시 자신들의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의 스승을 만나면, 조심스러워지고, 경건해져서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법이기에 아무도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이 스님은 많은 걸 일찍이 배웠고, 지식도 많아서 가르침을 주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마침내 그는 통찰력을 갖춘 한 젊은 초심 수행자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밑에서 수행하기를 청했습니다. 그 젊은 수행자가 말하기를 “네, 물론 저와 함께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수행하시기만 하면요. 근데, 열심히 하지 않으시면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투코 포틸라 스님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그 젊은 수행자의 제자가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젊은 수행자는 그에게 우선 모든 법복을 잘 갖추어 입으라고 말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진흙탕의 늪이 있었는데, 포틸라 스님이 모든 법복을 다 갖추어 입고 나자, 그 젊은 수행자는 “좋습니다. 자 이제는 저 진흙탕 속으로 뛰어 드십시오. 멈추라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멈추지 마세요. 일어나서 나오라고 할 때까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자, 뛰어 드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포틸라 스님은 법복을 단정히 입은 채로 늪 속으로 뛰어 들어서는 첨벙첨벙 늪 속을 휘저었습니다. 멈추라는 말이 없었기에 포틸라 스님은 계속해서 첨벙대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스님은 완전히 진흙에 흠뻑 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젊은 수행자는 “좋습니다. 이제 멈추세요. 자, 이제 나오시면 됩니다.”라고 말하였고 스님은 그제야 멈추고 늪을 나왔습니다.
위의 예는 포틸라 스님이 완전히 개인적인 자존심을 포기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배울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면, 그렇게 고명한 학승(學僧) 신분으로 아마 절대로 진흙탕 속에 뛰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포틸라 스님은 거리낌 없이 스스로 그렇게 하였고, 그 젊은 수행자도 이것을 보고 포틸라 스님이 확실하게 수행에 대한 결심이 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젊은 수행자는 포틸라 스님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과 감각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감각 대상을 관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직접 비유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개미집에 숨은 도마뱀을 잡은 어떤 남자의 예를 들었습니다. 개미집은 6개의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마뱀이 그 안으로 들어가 숨은 상태입니다. 어떻게 도마뱀을 잡아 낼 수 있을까요? 그 남자는 우선 6개의 구멍 중 5개를 닫아버립니다. 그리고는 무엇으로든 잘 밀봉해 버리죠. 그러고 나면 한 개의 구멍만이 열린 채로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저 그 구멍 앞에 앉아서 도마뱀이 튀어나올 때 만을 기다리다가 잡아내면 됩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의 접촉 감각을 닫고는 그저 마음만 남겨 놓습니다.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 감각을 닫는다는 의미는 그것들을 제어하고 진정시키며 그저 마음만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상은 도마뱀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호흡을 관찰할 때, ‘사띠’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띠는 깨어있으면서 되새기고 상기시키는 어떤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을 때, 쌈빠자나(Sampajanna), “내가 지금 …을 하고 있다.”라는 자각(自覺)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사띠(깨어서 상기시킴)와 쌈빠자나(自覺)을 가지고 호흡의 들고 남을 관찰해야 합니다.
깨어 있으면서 되새기는 것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성입니다. 결코 다른 외부에서 배워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아마도 마음은 꽤 수동적일 것이고 느낌이 일어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느낌입니다. 사띠는 그러한 느낌들과 하나하나 손을 맞잡듯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할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 “내가 올 것이다.”, “내가 갈 것이다.”, “내가 앉을 것이다.” 등등과 같은 사띠, 즉 깨어있음이 있는 것이고, “내가 걷고 있다.”, “내가 앉아 있다.”, “내가 어떠한 기분을 경험하고 있다.”와 같은 자각(自覺), 쌈빠자나(Sampajanna)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사띠와 쌈빠자나를 가지고 깨어 있으면서 되새기는 노력으로 스스로를 알게 되면, 현재 내 마음에 일어나는 작용들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느낌을 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요?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들을 아는 것이 바로 ‘마음(찌따:citta)’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느낌(아라마나:aramana)은 마음 속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기 모형 비행기 소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소리는 귀를 통해서 들어와서 우리 안을 여행합니다. 마음은 전기 비행기 소리라고 알게 됩니다. 소리를 인지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지금 소리를 인지하는 이 마음은 여전히 꽤 거친 편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마음일 뿐인 것이죠. 아마도 우리가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인지하는 마음 속에 짜증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알게 되는 이 마음을 진실과 일치하게 아는 마음으로 반드시 단련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과 일치하여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람들, 자동차, 비행기 소리 같은 것들에 쉽게 짜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짜증을 알게 되는 보통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실체에 따르기 보다는 우리의 해석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정제된 마음의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전기 비행기 소리를 그저 소리로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 소리는 전혀 우리를 짜증나거나 화나게 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그저 압니다. 이것이 소위 감각 대상이 일어남을 진실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힘을 기르면, 우리가 비행기 소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면, 소리는 절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조건에 따라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소리는 어떤 존재도, 개인도, 자아도, 우리 혹은 그들도 아닙니다. 그저 소리일 뿐입니다. 마음이 돌아가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안다면, 이러한 앎을 직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꿰뚫어서, 명확하게 아는 것이고, 진실, 실체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면 그저 소리가 제 갈 길을 가도록 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 그 소리에 내가 매우 화났어, 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정말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정말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라는 방식으로 생각하며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그 소리는 결코 우리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집착하면 고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고통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고통의 원인입니까? 그것은 현상의 진실을 모르고, 우리가 직관을 발전시키지 못하여, 우리가 아직 명확하지 않고 깨어있지 않은 것, 그래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거칠고, 다듬어지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유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훈련시켜서 강하게 만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몸을 단련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 저기 움직이고, 두드리며, 체조도 하고, 아침 저녁으로 달리기도 해줘야 합니다. 몸은 이렇게 해서 점점 강해지고, 보다 더 민첩해지며, 호흡계나 신경계가 운동하기 전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몸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움직임으로써가 아니라 마음을 멈추고 휴식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사마디를 수행할 때, 우리는 호흡의 들고 나감이나, 특정 사물 같은 대상을 정해 놓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의와 응시의 초점이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이란 우리의 자각하는 가운데 호흡을 따라가서 호흡의 들고 나감, 그 리듬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알아차림의 힘을 호흡에 두고 자연스러운 호흡의 들고 나감을 따르며 다른 모든 것은 그저 가도록 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에너지로 충전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한가지 주의 집중 대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음을 그저 이것 저것 생각하도록 둔다면 많은 주의 대상들이 있을 것이고 마음은 산란해지고, 멈추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멈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마음이 멈추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며 아무렇게나 바위고 벽돌이고, 잡초 등을 베고 다닌다면 칼은 금세 무뎌질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잘라서 사용할 만한 것들을 골라서 자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아무런 가치나 소용없는 생각이나 느낌에 방황하게 둔다면 우리의 마음은 약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쉴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에너지가 없으면, 지혜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너지 없는 마음은 바로 집중(사마디)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멈추지 않으면 감각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마음을 마음으로,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 자라날 수 있었던 뿌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마음을 가꾸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사마타(선정)와 위빠사나(통찰)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마음을 멈추게 하고, 지혜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도록 하여, 마음이 절제와 지혜를 가지도록 단련 시키십시오.
잘 아시겠지만, 우리 인류는 일을 하는 방식, 사는 방식,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사실 어린 아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만약 성인이 그 아이의 행위, 놀고 뛰어다니는 방식을 관찰하게 되면, 그 아이의 행동이 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훈련시키지 않으면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자각 없이 말하고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합니다. 스스로 퇴보하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돌아다닐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훈련하고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네 가지 보시로 불교를 잘 보살핀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저 피상적인 것일 뿐입니다. 나무로 보자면 그저 껍질이나 연약한 가지일 뿐입니다. 불교의 진정한 보살핌은 실천 수행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행위, 말 그리고 마음을 가르침에 따라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러한 실천 수행이 더 심오한 결과들을 가져다 주는 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르고 정직하다면, 우리가 절제와 지혜로 무장하고 있다면, 우리의 수행은 오직 훌륭한 발전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거기에는 질투나 적대감을 유발하는 원인이 없습니다. 불교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저 이 방식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관습을 그저 따르기 위해 계율을 받기로 결심했다면, 아무리 아잔께서 좋은 말씀을 하셔도, 우리는 여전히 실천 수행에서 부족할 것입니다. 우린 아마 가르침을 반복하여야 할지도 모르고, 같은 것들을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복 실천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수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많은 삶을 통해 불, 법, 승 삼보에 철저히 귀의하지 못하며 시간만 낭비하게 될 수도 있고, 불교라는 가르침의 핵심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달고 맛있다고 말하여지는 과일을 재배하여, 꽃을 피워내도 꽃 향기를 맡지 않고 과일 열매가 맺어도 그 열매를 먹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과일은 우리에게 별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품종이라 해도 진정한 참 맛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과일을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죠. 불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되새기지 않으면 우리는 보시, 지계, 선정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천 수행은 열쇠, 즉 명상의 열쇠와 같습니다. 우리가 손에 맞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문이 철저히 잠겨 있다 하더라도, 열쇠를 꽂고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열쇠가 없는 자물쇠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건 자물쇠를 열고 꺼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배워 깨우치라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실제로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습니다. 담마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저 기억에 근거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진실만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기억을 통하여 말하고 대개 공허한 이야기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 다른 지방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게 되어서 한동안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우연히 그를 기차 안에서 만났습니다. “아, 정말 반갑네요. 한번 찾아가려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죠. 전혀 생각 한번 하지 않았을텐데 그냥 반가움에서 쉽게 그런 말들이 나오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주의함으로부터 거짓말이 나오는 법입니다. 실제로 전혀 그 사람을 찾아 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한번도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었어도 한 순간에 느낌이 올라와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는 거짓말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하나의 깨끗하지 못한 행위인데요. 마음은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하도록 하는 느낌을 교묘히 만들어 냅니다. 세련된 형태의 거짓말이죠. 실제로 많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투코 포틸라 스님은 마음에 관한 그 젊은 수행자의 가르침을 잘 따랐습니다. 사띠와 쌈빠자나, 즉 완전한 깨어있음 속에서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을 묵묵히 관찰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거짓, 마음 속에 있는 거짓들을 보았습니다. 그것들이 마음 속에서 올라올 때의 부정(不淨)함을 보았습니다. 마치 도마뱀이 흰개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올라오자마자 그것들을 보았고, 곧바로 그 본성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를 보고 났더니, 곧바로 마음은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또 교묘히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잘 보살피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적 공여를 통한 보살핌입니다. 거기에는 네 가지의 보시가 있는데, 의복, 음식, 주거장소, 그리고 약품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의 상가에 물질적 지원을 해줌으로써 그들이 편안하게 지내면서 불교 수행법을 잘 유지하도록 하여 그 가르침을 보존키 위함입니다. 이러한 지원들은 부처님 가르침이 계속적이고 직접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며 불교라는 종교가 번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나무에 비유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무는 뿌리, 몸통, 가지, 잎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몸통을 포함한 각각의 잎새와 가지들은 영양분을 흡수하고, 또 그 영양분을 윗부분의 다른 부분에 보내주는 ‘뿌리’에 의존하게 됩니다. 나무는 스스로를 지탱해주는 뿌리에 의존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말들은 ‘가지’이고, ‘몸통’입니다. 마음은 그들에게 영양분을 흡수해서 날라주어 열매를 맺도록 해주는 ‘뿌리’입니다.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것은 반드시 옳은 견해 혹은 그릇된 견해에 기반을 두고 있고, 옳은 견해든지 그릇된 견해든지 우리의 말과 행위를 통해 바깥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실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불교를 보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그것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아니죠. 예를 들자면, 수계식을 하는 날에 ‘아잔 스님’께서는 재가자들이 삼가해야 할 서투른 행위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명상하거나 숙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계를 받는다면 진전은 어려울 것이며, 진정한 실천 수행을 통한 확고한 기반마련은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진정한 실천 수행은 보시의 실천 수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계행, 진정한 집중, 그리고 진정한 지혜를 확립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것에 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실천 수행을 통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불교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방대하게 기록된 부처님 가르침, 경전을 모두 배운다 하더라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 재세시에 ‘투코 포틸라(Tuccho Pothila)’라고 불리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경전 학습을 통해 매우 통찰력이 깊었습니다. 그 스님은 18개의 분원이 있는 사원을 가지고 계셨으며, 탁월한 스승이셨습니다. 너무 유명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추앙했습니다. ‘투코 포틸라’라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 위엄에 눌리어 아무도 감히 그가 가르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부처님 재세시에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한 명의 제자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부처님을 찾아 가서 존경의 예를 표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오, 오셨습니까?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이여.”라고 하시곤, 곧 이것 저것에 대해 얼마간 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 계신 곳을 떠나 다시 그가 거처하는 사원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아, 돌아가시게요?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님?.”라고 부처님께서 말하셨습니다. 즉, 말씀하신 것은, 그가 도착했을 때, “오셨습니까?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이여.”라고 한 것과 그가 가려할 때, “아, 돌아가시게요.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님?”이라고 한 두 마디 뿐인 것이었습니다. 이 두 마디가 부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전부였습니다. 투코 포틸라 스님은 탁월한 스승이었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왜 부처님께서 나에게 그 말씀을 하셨을까? 그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고, 계속해서 사색한 끝에, 비로소 “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성스러운 공허한 경전’의 뜻은 수행은 안 하고 오로지 학문적으로 공부만 하는 승려를 말씀하신 거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 보니 정말 일반 재가자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재가자들이 즐기는 것을 자기도 마찬가지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로운 마음을 성취한 이는 그 분 안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수행의 길에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주고, 진정한 평화로움을 제공해 줄 진정으로 수준 높은 깊은 심오함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행을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갈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가 보러 갔던 모든 수행 지도자들이 그의 제자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이 왕년의 스승을 다시 자신들의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의 스승을 만나면, 조심스러워지고, 경건해져서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법이기에 아무도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이 스님은 많은 걸 일찍이 배웠고, 지식도 많아서 가르침을 주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마침내 그는 통찰력을 갖춘 한 젊은 초심 수행자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밑에서 수행하기를 청했습니다. 그 젊은 수행자가 말하기를 “네, 물론 저와 함께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수행하시기만 하면요. 근데, 열심히 하지 않으시면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투코 포틸라 스님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그 젊은 수행자의 제자가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젊은 수행자는 그에게 우선 모든 법복을 잘 갖추어 입으라고 말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진흙탕의 늪이 있었는데, 포틸라 스님이 모든 법복을 다 갖추어 입고 나자, 그 젊은 수행자는 “좋습니다. 자 이제는 저 진흙탕 속으로 뛰어 드십시오. 멈추라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멈추지 마세요. 일어나서 나오라고 할 때까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자, 뛰어 드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포틸라 스님은 법복을 단정히 입은 채로 늪 속으로 뛰어 들어서는 첨벙첨벙 늪 속을 휘저었습니다. 멈추라는 말이 없었기에 포틸라 스님은 계속해서 첨벙대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스님은 완전히 진흙에 흠뻑 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젊은 수행자는 “좋습니다. 이제 멈추세요. 자, 이제 나오시면 됩니다.”라고 말하였고 스님은 그제야 멈추고 늪을 나왔습니다.
위의 예는 포틸라 스님이 완전히 개인적인 자존심을 포기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배울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면, 그렇게 고명한 학승(學僧) 신분으로 아마 절대로 진흙탕 속에 뛰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포틸라 스님은 거리낌 없이 스스로 그렇게 하였고, 그 젊은 수행자도 이것을 보고 포틸라 스님이 확실하게 수행에 대한 결심이 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젊은 수행자는 포틸라 스님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과 감각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감각 대상을 관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직접 비유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개미집에 숨은 도마뱀을 잡은 어떤 남자의 예를 들었습니다. 개미집은 6개의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마뱀이 그 안으로 들어가 숨은 상태입니다. 어떻게 도마뱀을 잡아 낼 수 있을까요? 그 남자는 우선 6개의 구멍 중 5개를 닫아버립니다. 그리고는 무엇으로든 잘 밀봉해 버리죠. 그러고 나면 한 개의 구멍만이 열린 채로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저 그 구멍 앞에 앉아서 도마뱀이 튀어나올 때 만을 기다리다가 잡아내면 됩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의 접촉 감각을 닫고는 그저 마음만 남겨 놓습니다.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 감각을 닫는다는 의미는 그것들을 제어하고 진정시키며 그저 마음만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상은 도마뱀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호흡을 관찰할 때, ‘사띠’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띠는 깨어있으면서 되새기고 상기시키는 어떤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을 때, 쌈빠자나(Sampajanna), “내가 지금 …을 하고 있다.”라는 자각(自覺)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사띠(깨어서 상기시킴)와 쌈빠자나(自覺)을 가지고 호흡의 들고 남을 관찰해야 합니다.
깨어 있으면서 되새기는 것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성입니다. 결코 다른 외부에서 배워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아마도 마음은 꽤 수동적일 것이고 느낌이 일어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느낌입니다. 사띠는 그러한 느낌들과 하나하나 손을 맞잡듯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할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 “내가 올 것이다.”, “내가 갈 것이다.”, “내가 앉을 것이다.” 등등과 같은 사띠, 즉 깨어있음이 있는 것이고, “내가 걷고 있다.”, “내가 앉아 있다.”, “내가 어떠한 기분을 경험하고 있다.”와 같은 자각(自覺), 쌈빠자나(Sampajanna)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사띠와 쌈빠자나를 가지고 깨어 있으면서 되새기는 노력으로 스스로를 알게 되면, 현재 내 마음에 일어나는 작용들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느낌을 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요?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들을 아는 것이 바로 ‘마음(찌따:citta)’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느낌(아라마나:aramana)은 마음 속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기 모형 비행기 소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소리는 귀를 통해서 들어와서 우리 안을 여행합니다. 마음은 전기 비행기 소리라고 알게 됩니다. 소리를 인지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지금 소리를 인지하는 이 마음은 여전히 꽤 거친 편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마음일 뿐인 것이죠. 아마도 우리가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인지하는 마음 속에 짜증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알게 되는 이 마음을 진실과 일치하게 아는 마음으로 반드시 단련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과 일치하여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람들, 자동차, 비행기 소리 같은 것들에 쉽게 짜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짜증을 알게 되는 보통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실체에 따르기 보다는 우리의 해석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정제된 마음의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전기 비행기 소리를 그저 소리로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 소리는 전혀 우리를 짜증나거나 화나게 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그저 압니다. 이것이 소위 감각 대상이 일어남을 진실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힘을 기르면, 우리가 비행기 소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면, 소리는 절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조건에 따라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소리는 어떤 존재도, 개인도, 자아도, 우리 혹은 그들도 아닙니다. 그저 소리일 뿐입니다. 마음이 돌아가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안다면, 이러한 앎을 직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꿰뚫어서, 명확하게 아는 것이고, 진실, 실체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면 그저 소리가 제 갈 길을 가도록 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 그 소리에 내가 매우 화났어, 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정말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정말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라는 방식으로 생각하며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그 소리는 결코 우리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집착하면 고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고통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고통의 원인입니까? 그것은 현상의 진실을 모르고, 우리가 직관을 발전시키지 못하여, 우리가 아직 명확하지 않고 깨어있지 않은 것, 그래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거칠고, 다듬어지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유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훈련시켜서 강하게 만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몸을 단련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 저기 움직이고, 두드리며, 체조도 하고, 아침 저녁으로 달리기도 해줘야 합니다. 몸은 이렇게 해서 점점 강해지고, 보다 더 민첩해지며, 호흡계나 신경계가 운동하기 전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몸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움직임으로써가 아니라 마음을 멈추고 휴식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사마디를 수행할 때, 우리는 호흡의 들고 나감이나, 특정 사물 같은 대상을 정해 놓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의와 응시의 초점이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이란 우리의 자각하는 가운데 호흡을 따라가서 호흡의 들고 나감, 그 리듬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알아차림의 힘을 호흡에 두고 자연스러운 호흡의 들고 나감을 따르며 다른 모든 것은 그저 가도록 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에너지로 충전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한가지 주의 집중 대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음을 그저 이것 저것 생각하도록 둔다면 많은 주의 대상들이 있을 것이고 마음은 산란해지고, 멈추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멈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마음이 멈추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며 아무렇게나 바위고 벽돌이고, 잡초 등을 베고 다닌다면 칼은 금세 무뎌질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잘라서 사용할 만한 것들을 골라서 자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아무런 가치나 소용없는 생각이나 느낌에 방황하게 둔다면 우리의 마음은 약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쉴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에너지가 없으면, 지혜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너지 없는 마음은 바로 집중(사마디)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멈추지 않으면 감각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마음을 마음으로,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 자라날 수 있었던 뿌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마음을 가꾸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사마타(선정)와 위빠사나(통찰)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마음을 멈추게 하고, 지혜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도록 하여, 마음이 절제와 지혜를 가지도록 단련 시키십시오.
잘 아시겠지만, 우리 인류는 일을 하는 방식, 사는 방식,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사실 어린 아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만약 성인이 그 아이의 행위, 놀고 뛰어다니는 방식을 관찰하게 되면, 그 아이의 행동이 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훈련시키지 않으면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자각 없이 말하고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합니다. 스스로 퇴보하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돌아다닐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훈련하고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네 가지 보시로 불교를 잘 보살핀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저 피상적인 것일 뿐입니다. 나무로 보자면 그저 껍질이나 연약한 가지일 뿐입니다. 불교의 진정한 보살핌은 실천 수행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행위, 말 그리고 마음을 가르침에 따라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러한 실천 수행이 더 심오한 결과들을 가져다 주는 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르고 정직하다면, 우리가 절제와 지혜로 무장하고 있다면, 우리의 수행은 오직 훌륭한 발전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거기에는 질투나 적대감을 유발하는 원인이 없습니다. 불교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저 이 방식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관습을 그저 따르기 위해 계율을 받기로 결심했다면, 아무리 아잔께서 좋은 말씀을 하셔도, 우리는 여전히 실천 수행에서 부족할 것입니다. 우린 아마 가르침을 반복하여야 할지도 모르고, 같은 것들을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복 실천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수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많은 삶을 통해 불, 법, 승 삼보에 철저히 귀의하지 못하며 시간만 낭비하게 될 수도 있고, 불교라는 가르침의 핵심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달고 맛있다고 말하여지는 과일을 재배하여, 꽃을 피워내도 꽃 향기를 맡지 않고 과일 열매가 맺어도 그 열매를 먹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과일은 우리에게 별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품종이라 해도 진정한 참 맛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과일을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죠. 불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되새기지 않으면 우리는 보시, 지계, 선정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천 수행은 열쇠, 즉 명상의 열쇠와 같습니다. 우리가 손에 맞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문이 철저히 잠겨 있다 하더라도, 열쇠를 꽂고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열쇠가 없는 자물쇠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건 자물쇠를 열고 꺼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배워 깨우치라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실제로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습니다. 담마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저 기억에 근거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진실만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기억을 통하여 말하고 대개 공허한 이야기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 다른 지방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게 되어서 한동안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우연히 그를 기차 안에서 만났습니다. “아, 정말 반갑네요. 한번 찾아가려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죠. 전혀 생각 한번 하지 않았을텐데 그냥 반가움에서 쉽게 그런 말들이 나오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주의함으로부터 거짓말이 나오는 법입니다. 실제로 전혀 그 사람을 찾아 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한번도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었어도 한 순간에 느낌이 올라와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는 거짓말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하나의 깨끗하지 못한 행위인데요. 마음은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하도록 하는 느낌을 교묘히 만들어 냅니다. 세련된 형태의 거짓말이죠. 실제로 많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투코 포틸라 스님은 마음에 관한 그 젊은 수행자의 가르침을 잘 따랐습니다. 사띠와 쌈빠자나, 즉 완전한 깨어있음 속에서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을 묵묵히 관찰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거짓, 마음 속에 있는 거짓들을 보았습니다. 그것들이 마음 속에서 올라올 때의 부정(不淨)함을 보았습니다. 마치 도마뱀이 흰개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올라오자마자 그것들을 보았고, 곧바로 그 본성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를 보고 났더니, 곧바로 마음은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또 교묘히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