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 19일
“밤낮은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빠르게 지나간다. 바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기 만족감을 멀리하고 실행이 행동의 하나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매우 고요하게 여기에 앉아있을지라도, 여전히 마음에 나타나는 행동이 있습니다. 호흡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있고, 그 집중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고, 호흡과 마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완전한 수행이란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반응하지 않거나 ‘알아차림’을 실행할 때에도 의도의 요소인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의도의 요소는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통찰(insight)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완벽하게 고요히 앉아있을 때라도 여전히 의도가 있으며, 의지 그 자체가 행동입니다. 이것은 상카라(sankhara), 즉 정신적 형성(行:fabrication)입니다. 이것은 늘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경험은 상카라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몸, 느낌, 지각, 생각, 의식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그러한 모든 집합체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능성을 실제적인 집합체로 꾸며야만 합니다. 형태에 대한 가능성을 실제적인 경험의 형태로, 감정에 대한 가능성을 실제적인 경험의 감정으로 조작합니다.
상카라의 요소는 항상 바탕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전 우주 구석구석에 퍼져 윙윙거리며 사라지지 않는 빅뱅의 배경 소음과 같습니다. 상카라의 요소는 항상 존재하며, 경험을 구체화하며, 그것을 잊어버리는 순간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수행할 때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관념(things)을 분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나타나는 아주 기본적인 상카라와 매 순간 우리가 만들어내는 업(kamma)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편안히 쉴 곳을 갖기 위해, 긴장된 신경을 진정시키기 쉬운 좋은 경험을 갖기 위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은 업의 한 부분이지만 완전한 실행은 아닙니다. 다른 부분은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분명하게 보는 것이며, 인간 행동의 잠재력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행동에 포함되어 있는 잠재력은 무엇일까?’그리고 나서 어색한 방법의 행동에서 초래되는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우리가 어느 정도 없앨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인간의 행동에 그러한 이해를 적용합니다.
수행할 때 항상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억하세요. 우리는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여기에 앉아 있게 됩니다.
머리 위로 ‘쿵’하고 나타나는 어떤 아이맥스(Imax)적인 경험이나 내면에 나타날 수 있는 일치에 대한 어떤 좋은 강렬한 감각을 단지 기다리며 앉아 있게 됩니다. 때때로 관념은 갑자기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관념이 어떻게 또는 왜 나타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것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은 평온하고, 잠시 동안은 놀랍지만, 관념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갖고자 하는 욕망과 타협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해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욕망도 그것들을 다시 갖게 하지 못합니다.
행동의 본성을 이해할 때까지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멈춤, 멈춤, 멈춤 함으로써 관념은 안정되고 고요해지며 공(emptiness)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행동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수행보다 더 넓은 범위의 것입니다.
수행에도 멈춤의 요소, 놓음의 요소가 있지만 멈추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놓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때까지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참으로 길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멈추고자 하는 것, 놓고자 하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수행을 마치고 나서 단순히 깨어나 부엌으로 가서 코코아를 가지고 잠자러 가지 마십시오. 원인과 결과의 패턴을 이해할 수 있도록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고요한 상태로 마음을 부리는 과정에서 무엇을 조작했는지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되었든, 그 길(path)은 의도된 길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의도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의도된 현상 중에서 최상의 것은 고귀한 여덟 가지 길(팔정도)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로 지금 따라야 할 길입니다. 팔정도는 함께 놓여져 있는 것이며 우리가 팔정도를 행함으로써 함께 놓여져 있는 것을 볼 때까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떤 것을 하고 있음을 항상 마음에 두십시오. 때때로 모든 시간을 단지 되돌림, 되돌림, 마음을 호흡에 되돌림 하면서 보내는 것이 실패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방랑을 끝낸 마음을 다시 대상에 되돌려 놓고 나면 마음은 다시 방랑합니다. 언제 평화와 고요함이 올까요? 글쎄요, 평화와 고요함이 오기 전에 우리는 어떤 이해를 개발해야 합니다.
마음을 대상에 되돌렸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마음이 방랑을 끝낼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마음이 방랑을 끝내도록 우리가 무엇을 북돋거나 허용했는지 이해하도록 노력하세요. 특히 이러한 앞뒤 과정에 개입되는 모든 익숙한 의도나 어색한 의도까지도 볼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마음이 어떻게 앞뒤로 움직이는지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이 앞뒤로 움직이지 않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수행을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통찰을, 행동을 바꾸는 통찰의 종류를 개발하게 될 것입니다.
- 원저 [MEDITATIONS-Forty Dhamma Talk] -
2003년 8월 19일
“밤낮은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빠르게 지나간다. 바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기 만족감을 멀리하고 실행이 행동의 하나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매우 고요하게 여기에 앉아있을지라도, 여전히 마음에 나타나는 행동이 있습니다. 호흡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있고, 그 집중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고, 호흡과 마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완전한 수행이란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반응하지 않거나 ‘알아차림’을 실행할 때에도 의도의 요소인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의도의 요소는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통찰(insight)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완벽하게 고요히 앉아있을 때라도 여전히 의도가 있으며, 의지 그 자체가 행동입니다. 이것은 상카라(sankhara), 즉 정신적 형성(行:fabrication)입니다. 이것은 늘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경험은 상카라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몸, 느낌, 지각, 생각, 의식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그러한 모든 집합체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능성을 실제적인 집합체로 꾸며야만 합니다. 형태에 대한 가능성을 실제적인 경험의 형태로, 감정에 대한 가능성을 실제적인 경험의 감정으로 조작합니다.
상카라의 요소는 항상 바탕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전 우주 구석구석에 퍼져 윙윙거리며 사라지지 않는 빅뱅의 배경 소음과 같습니다. 상카라의 요소는 항상 존재하며, 경험을 구체화하며, 그것을 잊어버리는 순간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수행할 때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관념(things)을 분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나타나는 아주 기본적인 상카라와 매 순간 우리가 만들어내는 업(kamma)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편안히 쉴 곳을 갖기 위해, 긴장된 신경을 진정시키기 쉬운 좋은 경험을 갖기 위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은 업의 한 부분이지만 완전한 실행은 아닙니다. 다른 부분은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분명하게 보는 것이며, 인간 행동의 잠재력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행동에 포함되어 있는 잠재력은 무엇일까?’그리고 나서 어색한 방법의 행동에서 초래되는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우리가 어느 정도 없앨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인간의 행동에 그러한 이해를 적용합니다.
수행할 때 항상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억하세요. 우리는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여기에 앉아 있게 됩니다.
머리 위로 ‘쿵’하고 나타나는 어떤 아이맥스(Imax)적인 경험이나 내면에 나타날 수 있는 일치에 대한 어떤 좋은 강렬한 감각을 단지 기다리며 앉아 있게 됩니다. 때때로 관념은 갑자기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관념이 어떻게 또는 왜 나타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것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은 평온하고, 잠시 동안은 놀랍지만, 관념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갖고자 하는 욕망과 타협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해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욕망도 그것들을 다시 갖게 하지 못합니다.
행동의 본성을 이해할 때까지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멈춤, 멈춤, 멈춤 함으로써 관념은 안정되고 고요해지며 공(emptiness)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행동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수행보다 더 넓은 범위의 것입니다.
수행에도 멈춤의 요소, 놓음의 요소가 있지만 멈추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놓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때까지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참으로 길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멈추고자 하는 것, 놓고자 하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수행을 마치고 나서 단순히 깨어나 부엌으로 가서 코코아를 가지고 잠자러 가지 마십시오. 원인과 결과의 패턴을 이해할 수 있도록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고요한 상태로 마음을 부리는 과정에서 무엇을 조작했는지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되었든, 그 길(path)은 의도된 길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의도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의도된 현상 중에서 최상의 것은 고귀한 여덟 가지 길(팔정도)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로 지금 따라야 할 길입니다. 팔정도는 함께 놓여져 있는 것이며 우리가 팔정도를 행함으로써 함께 놓여져 있는 것을 볼 때까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떤 것을 하고 있음을 항상 마음에 두십시오. 때때로 모든 시간을 단지 되돌림, 되돌림, 마음을 호흡에 되돌림 하면서 보내는 것이 실패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방랑을 끝낸 마음을 다시 대상에 되돌려 놓고 나면 마음은 다시 방랑합니다. 언제 평화와 고요함이 올까요? 글쎄요, 평화와 고요함이 오기 전에 우리는 어떤 이해를 개발해야 합니다.
마음을 대상에 되돌렸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마음이 방랑을 끝낼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마음이 방랑을 끝내도록 우리가 무엇을 북돋거나 허용했는지 이해하도록 노력하세요. 특히 이러한 앞뒤 과정에 개입되는 모든 익숙한 의도나 어색한 의도까지도 볼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마음이 어떻게 앞뒤로 움직이는지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이 앞뒤로 움직이지 않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수행을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통찰을, 행동을 바꾸는 통찰의 종류를 개발하게 될 것입니다.
- 원저 [MEDITATIONS-Forty Dhamma Tal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