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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issaro Bhikkhu - 무엇을 하는지 보라 2

2012-05-13

 식별은 의도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과, 항상 마음에 나타나는 행위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행위의 모든 기초적인 기본 원칙은 바로 여기입니다. 행동을 이끄는 물질적인 조작은 호흡입니다. 호흡이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물질적인 행동을 전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어적인 조작은 직접적인 생각과 평가입니다. 직접적인 생각과 평가가 없다면 우리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신적인 조작은 지각과 감정입니다. 지각과 감정이 없다면 정신적인 조작 과정은 이론을 세우기 위한 어떠한 기본 원칙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적, 언어적, 정신적인 조작이 활동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호흡에 둘 때 바로 여기에 물질적, 언어적, 정신적 조작들을 모두 함께 가져오십시오. 호흡에 집중하고, 우리의 생각을 호흡으로 향하게 하고, 호흡을 평가하고, 호흡을 분류하는 모든 정신적 표시를 알아차리고, 호흡을 따라 오는 즐겁거나 불쾌한 모든 감정을 알아차리십시오. 모든 기초적인 기본 원칙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 원칙은 관념이 아니라 활동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본적인 활동 단위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활동 단위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가져가야 할 것들입니다. 이 활동 단위들을 함께 가져가지 않는다면 마음은 우리를 떠나가고 머물기 위한 모든 종류의 다른 세상에 공을 들이게 됩니다. 기본적인 활동 단위로부터 마음의 주의심은 떠나가고 활동 단위의 최종 산물에 기생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활동 단위가 기본이 되는 이 단계, 이 단계, 이 단계에 되돌아오도록 스스로를 일깨우도록 하십시오. 마음이 고요하도록 이것들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이것은 의도적인 고요함이기 때문에 고요한 상태라 할지라도 행동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앎의 목적에 대한 행동입니다. 대부분의 행동은 무지 때문입니다. 무지로부터 초래되며 무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의 의도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하고자 하는 노력을 잊을 수 있으며 우리의 행동이 만들어 내는 최종 산물의 경험을 단순히 즐기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경험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올 때 종교적인 경험을 갖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해방의 경험이나 평화의 경험을 갖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담마(Dhamma:법)는 생산과 소비의 경험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습관 너머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함에도 말입니다. 끊임없는 습관 너머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생산과 소비 아래에 놓여져 있는 행동의 본성을 이해해야만 하고,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아야만 합니다.


 행위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마음이 행동할까요? 의도란 무엇일까요? 왜 마음은 의도를 가질까요? 이러한 과정은 정말로 즐거울까요, 아니면 귀찮을까요? 만약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원할까요?


 우리가 진심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닿기 전에 이러한 것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 행동의 완전한 한계를 탐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으며 우리의 행동으로부터 배우기 위해서 여기에 있습니다.


 행동에 대한 이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행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감각과 행동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입니다. 모든 위대한 종교가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멋진 말입니다. 매우 우호적입니다. 아주 세계적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종교가 행동-행동이란 무엇인가, 인간 행동에 잠재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비교해 볼 때, 각 종교들이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은 우리가 실제로는 전혀 행동하지 않으며, 우리를 관통하는 외부 힘의 작용이 있으며, 모든 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가르침은 우리는 행동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실제적인 결과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는 진정한 행복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는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외부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행동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가르침들을 총괄하여 다룰 수 없으며 그 차이를 셀 수 없는 체 합니다. 사실 그러한 가르침은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서로의 방식에 관여합니다.


 이것이 초기 불교도들이 행동에 대한 가르침은 불교와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택하고 태도를 취해야 하는 부분에서 그 가르침이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강력히 주장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공(空)이나 닙바나(nibbana)라는 어떤 좋은 평범함으로 가르침을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동을 중요한 것을 보듯이 보라고 하셨고 항상 마음에 그 중요함을 유지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행동 이론에 우리의 희망을 둘 것인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삼보(Triple Gem)에 귀의할 때 우리가 귀의하고자 하는 것은 행동에 대한 가르침, 업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귀의하는 것은 따뜻하지도 멍청하지도 비겁한 핑계도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과 의도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지는 행위입니다.


 얼마나 멀리까지 우리의 행동을 계획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기꺼이 덮개를 밀쳐낼 수 있을까요? 이 질문들은 우리 자신에게 대답해야만 하는 것들이며 그 누구도 우리에게 답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세요. 인간 행동의 끝까지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더 이상 의도가 없는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단지 역사적인 호기심으로 그 말씀을 가질 수도 있고, 개인적인 도전으로 그 말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여기에 수행을 하며 앉아 있고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을 때, 날씨 때문이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루의 어떤 시간 때문이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소재를 보고 그 소재를 고요한 상태로 만드는 기술을 보십시오. 불교도의 관점에서 보면 그 소재는 과거의 행동에서 옵니다. 우리 손에 가지고 있는 소재라는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선택의 자유는 항상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이 잘 안 된다면,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의도를 보십시오. 지각을 보고, 마음에서 취하는 질문을 보십시오. 실험하십시오. 즉석에서 해 보세요.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지 보십시오.


 수행이 잘 된다면, 잘 유지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감각을 어떻게 우리가 보다 더 잘 개발할 수 있는지 보십시오. 이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직접 의도의 요소와 행동의 요소와 만나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수행할 때 수행이 잘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앉아 있다면, 우리는 불평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능숙한 행동일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십시오. 우리는 항상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이 잘 될 때, 우리는 항상 만족함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족함을 가졌다면, 어디에서 만족감을 가져 왔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딱 맞게 조정하도록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은 여기입니다. 선택이 여기임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특정한 상황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생생하게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서 수행이 단지 주변을 채찍질하는 행동이 아니라 익숙한 행동이 되게 하십시오. 관찰하고, 지켜보고, 이 질문을 해 보십시오.


 ‘의도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어떻게 내 의도의 결과를 볼 수 있는가? 어디에 내 의도의 결과들이 나타나는가?’


 그 결과는 우리의 마음 상태와 호흡에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에서 바르게 보고, 바로 여기에서 조정하십시오. 우리가 인간 행동의 본성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호흡과 함께 일할 때, 호흡에 마음을 두고자 노력할 때, 마음이 머물 수 있는 좋은 곳에서 호흡을 하고자 할 때 등등 우리 자신의 행동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기타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 행동의 기본 요소로 주변 여기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관찰력이 예민하다면, 잠시 후 장난치는 소리는 음악으로 변할 것입니다. 호흡과 관련한 관찰력이 보다 많이 예민해질수록, 혼란스러움은 보다 많은 발견의 과정으로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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