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미 옮김
<두 번째 -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붓다께서 말씀하시길 :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다음과 같다.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슬픔, 비탄, 분노, 우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Five Aggregates(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고통이다.”
“내면의 눈, 통찰력, 지혜, 지식, 빛을 알게 된 후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내면의 눈, 통찰력, 지혜, 지식, 빛을 알게 된 후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면의 눈, 통찰력, 지혜, 지식, 빛을 알게 된 후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Dhammacakkappavattanasutta(담마카까빠바따나수타), 첫 번째로 행하신 설법 중에서 -
· 해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고통과 연결된 삶을 살아갑니다. 붓다께서는 고통에 대한 내용을 필두로 그가 깨달으신 진리의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진실한 사람들은 이 진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늙어갈수록 그 자신과 가족, 친척, 친구, 사회의 관계 속에서 더 많은 고통을 봅니다. 사회적인 성공이나 육체적인 쾌락으로 얻은 행복 속에도 항상 일정 정도의 고통이 내재해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현상으로 볼 때 차가움 속에 일정 정도의 열이 항상 존재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지구상에서 열 없이는 차가움도 존재할 수 없고, 고통 없이는 행복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Sahagata(사하가타), 즉 고통이 내재함 또는 잠재함이라고 합니다. 진지하고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여정은 날카로운 고통의 가시들로 덮여있어 지친 인생의 여행자의 발을 찌르고 고통을 줍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과 동물의 모든 행위의 근본에는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 잠잠해지고 일시적으로 사라질 때마다 그 순간을 행복이라는 잘못된 관념의 이름을 붙이며 즐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늙어감에 따라 육체는 더욱 쇠약해지고 고통은 더욱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고통을 잠재우려는 힘이 쇠약해지면서 고통에 대한 저항이 멈출 때까지 고통은 더욱 강렬해집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자들 중에는 붓다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그 중 한명으로 인생은 고통을 제공한다고 믿었으며, 이런 견해로 인해 그는 비관주의 철학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고통으로 바라보았으며,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과 동일하였습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한 쉼없는 여행입니다. 만물은 항상 변하므로 행복과 불행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Viparinamadukkha(비파리나마둑카)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든 만물이 변하는 성질로 인해 고통이 생겨난다는 의미입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사물의 어두운 면과 나쁜 면 만을 보고 이로써 인생에 대해 부정적이고 우울한 견해를 갖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비관주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인생의 밝고 행복한 면을 강조하는 낙관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낙관주의자의 관점으로 볼 때 전 세계와 인생은 중립된 개념으로, 선하거나 악하거나 행복을 누리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은 개인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낙관주의자 들이었던 반면, Cynicist(냉소주의, 금욕주의)는 비관주의였습니다.
● 비관주의인가 낙관주의인가?
그렇다면 불교는 어디에 속할까요? 비관주의일까요? 낙관주의일까요? 언뜻 보면 불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고통에 대한 진리를 강조하므로 확실히 비관주의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는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간적인 입장에 속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의 측면을 강조하긴 하지만,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근원을 설명하는 것은 곧 행복의 근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행복과 고통 모두 각각의 근본적인 원인을 통해 형성되며, 근원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말씀하신 다음 설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Whatever springs from causes (봄이 오는 원인이 무엇이든지)
Of those causes the Buddhahas said (붓다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네).
Whatever extinction(of suffering) there is (고통의 소멸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든지)
Of that extinction the Buddhahas said (붓다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네).
Thus spoke the Great Recluse (위대한 스승의 말씀에 모든 것이 다 있네).”
간단히 말해서, 윗글은 부처께서 고통의 원인과 고통을 소멸하는 근본 방법, 즉 바른 길을 깨달으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사성제가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윗글에 나타나듯이 불교에서는 인생과 세계를 현실적인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 진리를 드러냅니다. 이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어떤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질병의 원인 및 이를 극복 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은 무엇인지, 다시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고통을 토대로 하며, 이러한 고통을 소멸하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고통을 언급하는 것을 비관 주의적 측면,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낙관주의적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 모두이거나 이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고,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진실과 같은 이치입니다.
● 고통의 여러 가지 종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에서 고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질병, 분노, 우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Five Aggregates(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즉 고통이다.”
· 개요
생(生),노(老),사(死)는 SabhavaDukkha(사바바두카) 또는 자연적인 고(苦)입니다. 태어남을 맞은 사람은 모두가 피할 수없이 나이를 먹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Dhammavicarana(담마비카라나)라는 서적에서 Supreme Patriarch H.R. H Prince Vajirananavarorasa는 “생(生)은 고통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태에서 출산되기 때문이다. 노(老)는 고통이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 노화하며 즐거움이 감소하고 소멸의 징후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사(死)도 고통이다. 왜냐하면 죽음 전에는 참기 힘든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생(生), 노(老), 병(病), 사(死)는 그 자체로는 고통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적인 고통을 유발합니다. 육체적 아픔이나 질병으로 인해 고통이 생겨나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죽음도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함으로써 고통을 생성합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죽음이 고통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은 알 수 없는 사후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걱정이 결합되면서 결국은 죽음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4번째부터 11번째 요소까지는 경우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고통입니다. 이런 요소들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존재하며 자주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가진 직장인 여성의 예를 들어봅시다. 엄마는 아이를 집에 두고 일을 하러 갑니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 즉 사랑하는 아이와 항상 함께 있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슬픔과 비탄을 경험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도 엄마와 같은 상황에 있고 같은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생하는 고통의 예입니다.
다른 의미로 볼 때,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윗글에서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분류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영미 옮김
<두 번째 -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붓다께서 말씀하시길 :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다음과 같다.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슬픔, 비탄, 분노, 우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Five Aggregates(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고통이다.”
“내면의 눈, 통찰력, 지혜, 지식, 빛을 알게 된 후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내면의 눈, 통찰력, 지혜, 지식, 빛을 알게 된 후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면의 눈, 통찰력, 지혜, 지식, 빛을 알게 된 후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Dhammacakkappavattanasutta(담마카까빠바따나수타), 첫 번째로 행하신 설법 중에서 -
· 해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고통과 연결된 삶을 살아갑니다. 붓다께서는 고통에 대한 내용을 필두로 그가 깨달으신 진리의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진실한 사람들은 이 진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늙어갈수록 그 자신과 가족, 친척, 친구, 사회의 관계 속에서 더 많은 고통을 봅니다. 사회적인 성공이나 육체적인 쾌락으로 얻은 행복 속에도 항상 일정 정도의 고통이 내재해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현상으로 볼 때 차가움 속에 일정 정도의 열이 항상 존재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지구상에서 열 없이는 차가움도 존재할 수 없고, 고통 없이는 행복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Sahagata(사하가타), 즉 고통이 내재함 또는 잠재함이라고 합니다. 진지하고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여정은 날카로운 고통의 가시들로 덮여있어 지친 인생의 여행자의 발을 찌르고 고통을 줍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과 동물의 모든 행위의 근본에는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 잠잠해지고 일시적으로 사라질 때마다 그 순간을 행복이라는 잘못된 관념의 이름을 붙이며 즐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늙어감에 따라 육체는 더욱 쇠약해지고 고통은 더욱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고통을 잠재우려는 힘이 쇠약해지면서 고통에 대한 저항이 멈출 때까지 고통은 더욱 강렬해집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자들 중에는 붓다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그 중 한명으로 인생은 고통을 제공한다고 믿었으며, 이런 견해로 인해 그는 비관주의 철학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고통으로 바라보았으며,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과 동일하였습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한 쉼없는 여행입니다. 만물은 항상 변하므로 행복과 불행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Viparinamadukkha(비파리나마둑카)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든 만물이 변하는 성질로 인해 고통이 생겨난다는 의미입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사물의 어두운 면과 나쁜 면 만을 보고 이로써 인생에 대해 부정적이고 우울한 견해를 갖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비관주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인생의 밝고 행복한 면을 강조하는 낙관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낙관주의자의 관점으로 볼 때 전 세계와 인생은 중립된 개념으로, 선하거나 악하거나 행복을 누리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은 개인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낙관주의자 들이었던 반면, Cynicist(냉소주의, 금욕주의)는 비관주의였습니다.
● 비관주의인가 낙관주의인가?
그렇다면 불교는 어디에 속할까요? 비관주의일까요? 낙관주의일까요? 언뜻 보면 불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고통에 대한 진리를 강조하므로 확실히 비관주의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는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간적인 입장에 속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의 측면을 강조하긴 하지만,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근원을 설명하는 것은 곧 행복의 근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행복과 고통 모두 각각의 근본적인 원인을 통해 형성되며, 근원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말씀하신 다음 설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Whatever springs from causes (봄이 오는 원인이 무엇이든지)
Of those causes the Buddhahas said (붓다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네).
Whatever extinction(of suffering) there is (고통의 소멸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든지)
Of that extinction the Buddhahas said (붓다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네).
Thus spoke the Great Recluse (위대한 스승의 말씀에 모든 것이 다 있네).”
간단히 말해서, 윗글은 부처께서 고통의 원인과 고통을 소멸하는 근본 방법, 즉 바른 길을 깨달으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사성제가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윗글에 나타나듯이 불교에서는 인생과 세계를 현실적인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 진리를 드러냅니다. 이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어떤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질병의 원인 및 이를 극복 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은 무엇인지, 다시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고통을 토대로 하며, 이러한 고통을 소멸하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고통을 언급하는 것을 비관 주의적 측면,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낙관주의적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 모두이거나 이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고,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진실과 같은 이치입니다.
● 고통의 여러 가지 종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에서 고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질병, 분노, 우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Five Aggregates(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즉 고통이다.”
· 개요
생(生),노(老),사(死)는 SabhavaDukkha(사바바두카) 또는 자연적인 고(苦)입니다. 태어남을 맞은 사람은 모두가 피할 수없이 나이를 먹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Dhammavicarana(담마비카라나)라는 서적에서 Supreme Patriarch H.R. H Prince Vajirananavarorasa는 “생(生)은 고통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태에서 출산되기 때문이다. 노(老)는 고통이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 노화하며 즐거움이 감소하고 소멸의 징후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사(死)도 고통이다. 왜냐하면 죽음 전에는 참기 힘든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생(生), 노(老), 병(病), 사(死)는 그 자체로는 고통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적인 고통을 유발합니다. 육체적 아픔이나 질병으로 인해 고통이 생겨나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죽음도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함으로써 고통을 생성합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죽음이 고통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은 알 수 없는 사후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걱정이 결합되면서 결국은 죽음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4번째부터 11번째 요소까지는 경우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고통입니다. 이런 요소들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존재하며 자주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가진 직장인 여성의 예를 들어봅시다. 엄마는 아이를 집에 두고 일을 하러 갑니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 즉 사랑하는 아이와 항상 함께 있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슬픔과 비탄을 경험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도 엄마와 같은 상황에 있고 같은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생하는 고통의 예입니다.
다른 의미로 볼 때,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윗글에서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분류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