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미 옮김
<세 번째. 고통의 길>
한없이 이어진 길의 중간 지점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인생은 고통의 중심에서 시작되어 앞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에서 고통은 길에, 인생은 자동차에 비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고통이라는 길을 달립니다. 달리는 동안 바퀴는 마찰로 인해 점점 닳아지고 연료는 끊임없이 소모되며, 엔진도 수명을 다 해갑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속세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자연적인 고통의 불(火)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적인 고통의 불(火)로 인해 끊임없이 소모되어 갑니다. 인생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있으며, 슬픔과 비탄에 시달리면서 육체와 정신은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Adittapariyayasutta(아디따파리얏냐수따)의 수도자들에게 내리신 가르침에 따르면 감각을 인지하는 주체(눈, 귀, 코, 혀, 몸, 마음)와 감각의 대상(보이는 것, 소리, 냄새, 맛, 촉감, 사고)은 모두 불탄다고 합니다. 이것들에 불을 붙이는 것은 생(生), 노(老), 사(死)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의 불(火)과, 번뇌(Kilesa)나 욕망(lust), 미움, 망상과 같은 정신적인 오염(defilements)의 불(火)입니다.
성스러운 제자들의 눈으로 볼 때 속세에서 행복으로 여기는 것, 즉 감각의 산물로 얻어지는 행복은 단지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성스러운 제자들은 속세의 행복이란 고통의 불 속에서 퇴색되고, 정신적인 번뇌와 같은 고통의 불(火)에 타버리는 무상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철학적으로, 속세의 행복이란 결국에는 슬픔과 비탄으로 끝나버리는 순간적인 쾌락일 뿐입니다. 쾌락과 즐거움은 내면에 열과 괴로움을 동반합니다. 먹음직스러운 낚시 밥 속에 감춰진 날카로운 낚시 바늘처럼, 즐거움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고통과 슬픔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이것을 보려면 성능 좋은 현미경이 필요한 것처럼 즐거움 뒤에 숨겨진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은 일반적인 세속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갈고 닦은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가시가 깔려있는 오솔길이며, 우리는 맨발로 이 길을 걸어가는 여행자입니다. 우리는 길에 깔린 가시를 밟을 때마다 맨발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이란 가시길에서 발을 들어 올릴 때 가시로부터 벗어나는 그 짧은 순간을 말합니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가시를 밟는 고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시 서 있는 경우에도 가시로 둘러싸인 길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질병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그러나 늙음은 우리가 잠들어 있는 모든 순간까지 일분 일초도 쉬지 않고 진행되어 우리의 젊음을 약탈하고 인생을 공격해 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 인생은 노(老), 병(病), 사(死)의 섭리에 따라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모든 인간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와 같습니다. 다만, 인생이라는 감옥에서는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나중에 죽는지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붓다께서는 항상 그의 제자들에게 인생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모든 종류의 고통과 위험으로 둘러싸여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진실로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생리학과 불교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UayKetusingh라는 의학교수는 ‘Science studies Buddhism’라는 귀중한 글을 집필하였습니다.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이글에는 생(生)과 고통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가 사실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생(生)은 고통이다.”라는 말에서 생(生)이란 유(有:bhava) 또는 생(生:jati)을 의미합니다. 유(有:bhava)란 존재자체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생(生:jati)이란 태어남, 생성됨을 말합니다. 첫 번째 유(有:bhava)의 의미에 따르면 태어남이란 고통의 시작으로, 고통을 기차에 비유하자면 기차의 머리 부분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상태, 즉 고통이 없는 상태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두 번째 생(生:jati)의 의미를 살펴보면 고통의 의미가 보다 명확해집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자궁은 여러 면에서 상당히 안락합니다. 여기에서는 태반을 통해 산소와 영양소가 공급되고 이산화탄소와 배설물이 배출되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아도 되고 먹거나 배설물을 치울 필요도 없습니다. 이곳은 물에 떠있는 안전한 보호막입니다. 그러나 태어남의 시기가 다가오면서 고통도 시작됩니다.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아기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몸의 위치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어머니의 고통도 시작됩니다. 자궁을 수축하고 아기 몸을 압박하여 아기 머리보다 훨씬 작은 출구를 향해 아기를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출산 중에는 아기를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산모 몸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나게 되고 아기가 나오는 출구의 크기도 몇 배로 늘어납니다. 자궁은 수축하면서 아직은 단단하지 않은 뼈로 연결된 아기 머리를 압박하여 출구 쪽으로 밀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아기는 평소보다 3~4배 넓어진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가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이렇듯, 머리가 아래로 향하는 순간부터 태어날 때까지는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일부 아기들은 이 과정에서 머리에 너무 많은 압력을 받거나 기타 문제로 인해 자궁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기도 합니다. 머리가 출구로 나오는 마지막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입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태어난 경우, 이제 막 첫 번째 생(生)의 고통을 이겨낸 아기 앞에는, 또 다른 생(生:jati) - 후, 즉 태어난 이후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는 살아가면서 배고픔, 갈증, 더위, 추위, 소멸 및 기타 요건으로 인한 고통을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의 예는 아기가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경우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출산 중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더 큰 고통과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부 아기는 몸의 위치가 잘못 되어 사산하기도 하며, 일부 아기는 자기 어머니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죽임을 당하거나 팔다리가 잘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태어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현실인지를 너무도 잘 보여줍니다.
늙음과 죽음이 어떻게 고통을 일으키는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생(生), 노(老), 병(病), 사(死)로 인한 고통은 sabhavadukkha(사파바두카) 또는 자연적인 고(苦)에 포함되는 것으로 육체를 가진 존재는 모두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나머지 고통은 모두 때때로 발생하는 것으로 육체적인 질병, 슬픔, 비탄, 분노, 우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등입니다. 이것들도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붓다께서는 이런 내용을 “Five Aggregates(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다.”라고 간략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Aggregates(온:蘊)은 원래 우리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이나 소유로 여겨 집착하게 되면 고통이 생겨납니다. Aggregates(온:蘊)은 일련의 원인으로 인해 생겨났다가 다른 일련의 원인에 의해 인해 소멸합니다. 이렇듯, Aggregates(온:蘊)의 생성과 소멸은 특정 원인으로 인해 생성. 소멸하는 것이며 우리와 연관된 것이 아닙니다.
남자나 여자, 아이나 어른,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관계없이 의식을 가진 존재는 모두 고통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들은 어김없이 모두 늙고 병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소유물로부터 떨어져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과 동물의 몸에는 육체적 고통이라는 화살이, 정신에는 정신적 고통이라는 화살이 꽂혀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화살이 주는 고통은 억제하지 않으면 점점 참기 힘들어집니다. 화살이 주는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제어하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함으로써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상입니다. 자살을 한 후에는 더 큰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고통은 일정한 원인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이 그를 압도하지 못하도록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그의 고귀한 통찰력으로 의식을 가진 존재가 어떻게 고통에 잠식되는지 꿰뚫어 보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고통의 바다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언제 어떻게 이 희망 없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집(集:Samudaya)을 있는 그대로 보기 전에는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한 의도, 피나는 고행, 애절한 슬픔의 기도등도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처방전 종이가 효과가 있다고 착각하여 약전(pharmacopoeia)에 따른 처방전을 질병에 직접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질병이 낫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각 질병에 해당하는 원인을 찾은 다음 알맞은 약으로 치료하는 것뿐입니다.
고통은 인생과 밀접하게 연결된 뗄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만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입니다. 붓다께서는 그의 가르침에서 이 점을 자주 강조하시면서 “예나 지금이나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고통과 고통의 소멸에 대한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고통이 어떻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중 하나의 요소를 이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2002년 12월 26일
백영미 옮김
<세 번째. 고통의 길>
한없이 이어진 길의 중간 지점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인생은 고통의 중심에서 시작되어 앞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에서 고통은 길에, 인생은 자동차에 비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고통이라는 길을 달립니다. 달리는 동안 바퀴는 마찰로 인해 점점 닳아지고 연료는 끊임없이 소모되며, 엔진도 수명을 다 해갑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속세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자연적인 고통의 불(火)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적인 고통의 불(火)로 인해 끊임없이 소모되어 갑니다. 인생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있으며, 슬픔과 비탄에 시달리면서 육체와 정신은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Adittapariyayasutta(아디따파리얏냐수따)의 수도자들에게 내리신 가르침에 따르면 감각을 인지하는 주체(눈, 귀, 코, 혀, 몸, 마음)와 감각의 대상(보이는 것, 소리, 냄새, 맛, 촉감, 사고)은 모두 불탄다고 합니다. 이것들에 불을 붙이는 것은 생(生), 노(老), 사(死)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의 불(火)과, 번뇌(Kilesa)나 욕망(lust), 미움, 망상과 같은 정신적인 오염(defilements)의 불(火)입니다.
성스러운 제자들의 눈으로 볼 때 속세에서 행복으로 여기는 것, 즉 감각의 산물로 얻어지는 행복은 단지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성스러운 제자들은 속세의 행복이란 고통의 불 속에서 퇴색되고, 정신적인 번뇌와 같은 고통의 불(火)에 타버리는 무상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철학적으로, 속세의 행복이란 결국에는 슬픔과 비탄으로 끝나버리는 순간적인 쾌락일 뿐입니다. 쾌락과 즐거움은 내면에 열과 괴로움을 동반합니다. 먹음직스러운 낚시 밥 속에 감춰진 날카로운 낚시 바늘처럼, 즐거움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고통과 슬픔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이것을 보려면 성능 좋은 현미경이 필요한 것처럼 즐거움 뒤에 숨겨진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은 일반적인 세속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갈고 닦은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가시가 깔려있는 오솔길이며, 우리는 맨발로 이 길을 걸어가는 여행자입니다. 우리는 길에 깔린 가시를 밟을 때마다 맨발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이란 가시길에서 발을 들어 올릴 때 가시로부터 벗어나는 그 짧은 순간을 말합니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가시를 밟는 고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시 서 있는 경우에도 가시로 둘러싸인 길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질병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그러나 늙음은 우리가 잠들어 있는 모든 순간까지 일분 일초도 쉬지 않고 진행되어 우리의 젊음을 약탈하고 인생을 공격해 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 인생은 노(老), 병(病), 사(死)의 섭리에 따라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모든 인간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와 같습니다. 다만, 인생이라는 감옥에서는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나중에 죽는지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붓다께서는 항상 그의 제자들에게 인생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모든 종류의 고통과 위험으로 둘러싸여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진실로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생리학과 불교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UayKetusingh라는 의학교수는 ‘Science studies Buddhism’라는 귀중한 글을 집필하였습니다.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이글에는 생(生)과 고통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가 사실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생(生)은 고통이다.”라는 말에서 생(生)이란 유(有:bhava) 또는 생(生:jati)을 의미합니다. 유(有:bhava)란 존재자체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생(生:jati)이란 태어남, 생성됨을 말합니다. 첫 번째 유(有:bhava)의 의미에 따르면 태어남이란 고통의 시작으로, 고통을 기차에 비유하자면 기차의 머리 부분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상태, 즉 고통이 없는 상태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두 번째 생(生:jati)의 의미를 살펴보면 고통의 의미가 보다 명확해집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자궁은 여러 면에서 상당히 안락합니다. 여기에서는 태반을 통해 산소와 영양소가 공급되고 이산화탄소와 배설물이 배출되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아도 되고 먹거나 배설물을 치울 필요도 없습니다. 이곳은 물에 떠있는 안전한 보호막입니다. 그러나 태어남의 시기가 다가오면서 고통도 시작됩니다.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아기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몸의 위치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어머니의 고통도 시작됩니다. 자궁을 수축하고 아기 몸을 압박하여 아기 머리보다 훨씬 작은 출구를 향해 아기를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출산 중에는 아기를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산모 몸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나게 되고 아기가 나오는 출구의 크기도 몇 배로 늘어납니다. 자궁은 수축하면서 아직은 단단하지 않은 뼈로 연결된 아기 머리를 압박하여 출구 쪽으로 밀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아기는 평소보다 3~4배 넓어진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가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이렇듯, 머리가 아래로 향하는 순간부터 태어날 때까지는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일부 아기들은 이 과정에서 머리에 너무 많은 압력을 받거나 기타 문제로 인해 자궁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기도 합니다. 머리가 출구로 나오는 마지막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입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태어난 경우, 이제 막 첫 번째 생(生)의 고통을 이겨낸 아기 앞에는, 또 다른 생(生:jati) - 후, 즉 태어난 이후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는 살아가면서 배고픔, 갈증, 더위, 추위, 소멸 및 기타 요건으로 인한 고통을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의 예는 아기가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경우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출산 중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더 큰 고통과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부 아기는 몸의 위치가 잘못 되어 사산하기도 하며, 일부 아기는 자기 어머니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죽임을 당하거나 팔다리가 잘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태어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현실인지를 너무도 잘 보여줍니다.
늙음과 죽음이 어떻게 고통을 일으키는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생(生), 노(老), 병(病), 사(死)로 인한 고통은 sabhavadukkha(사파바두카) 또는 자연적인 고(苦)에 포함되는 것으로 육체를 가진 존재는 모두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나머지 고통은 모두 때때로 발생하는 것으로 육체적인 질병, 슬픔, 비탄, 분노, 우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등입니다. 이것들도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붓다께서는 이런 내용을 “Five Aggregates(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다.”라고 간략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Aggregates(온:蘊)은 원래 우리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이나 소유로 여겨 집착하게 되면 고통이 생겨납니다. Aggregates(온:蘊)은 일련의 원인으로 인해 생겨났다가 다른 일련의 원인에 의해 인해 소멸합니다. 이렇듯, Aggregates(온:蘊)의 생성과 소멸은 특정 원인으로 인해 생성. 소멸하는 것이며 우리와 연관된 것이 아닙니다.
남자나 여자, 아이나 어른,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관계없이 의식을 가진 존재는 모두 고통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들은 어김없이 모두 늙고 병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소유물로부터 떨어져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과 동물의 몸에는 육체적 고통이라는 화살이, 정신에는 정신적 고통이라는 화살이 꽂혀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화살이 주는 고통은 억제하지 않으면 점점 참기 힘들어집니다. 화살이 주는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제어하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함으로써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상입니다. 자살을 한 후에는 더 큰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고통은 일정한 원인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이 그를 압도하지 못하도록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그의 고귀한 통찰력으로 의식을 가진 존재가 어떻게 고통에 잠식되는지 꿰뚫어 보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고통의 바다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언제 어떻게 이 희망 없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집(集:Samudaya)을 있는 그대로 보기 전에는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한 의도, 피나는 고행, 애절한 슬픔의 기도등도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처방전 종이가 효과가 있다고 착각하여 약전(pharmacopoeia)에 따른 처방전을 질병에 직접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질병이 낫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각 질병에 해당하는 원인을 찾은 다음 알맞은 약으로 치료하는 것뿐입니다.
고통은 인생과 밀접하게 연결된 뗄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만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입니다. 붓다께서는 그의 가르침에서 이 점을 자주 강조하시면서 “예나 지금이나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고통과 고통의 소멸에 대한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고통이 어떻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중 하나의 요소를 이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2002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