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빠
사 나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2012-04-17

우 소다나 사야도 가르침

범라 스님 통역



 우선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붓다락키따 스님, 그리고 한국불자 여러분들 대단히 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부처님께서 위나야, 숫단타, 아비담마 이 세 가지 법문을 하신 가운데 사띠 숟따라는 경전을 여러분한테 담마의 보시(담마다나)를 하겠습니다. 이 사띠 숟따라는 것은 일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법문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일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법이라는 이 경전은 부처님께서 2500년 전 사왓띠 성안에 있는 제따와나 정사에서 어느 날 천인이 내려와서 질문을 하였을 때 설하신 법문이 이 사띠 숟따 법문입니다. 요즘에는 천인을 언제 누구 봤느냐 안 봤으니까 믿을 수 없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듣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없다고 반박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혹시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들 바람을 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바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이 천인이라는 존재는 우리 일반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라한이나 부처님이나 특별한 지혜의 눈을 갖춘 분 눈에는 보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무조건 거부하지 말고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분들이 말씀하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도 또한 현명한 일이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비얌마 천인에게 의심 한 가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와서 게송으로 여쭈었습니다. 그 게송의 뜻이 어떤 것이냐 하면 “부처님 만약에 어느 사람의 가슴에 화살이 꽂혀 있다면 다른 일을 다 제쳐두고 일단 그 화살을 뽑아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듯이 다섯 가지 오욕락에 잘 물들 수 있는 범부들은 그 탐착을 떼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한 가지 더 들었습니다. “부처님, 만약에 어떤 한 사람이 머리 위에 불이 훨훨 타고 있다면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이 머리 위의 불을 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듯이 일반 범부들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될 것이 깜마오욕락에 집착하는 그런 딴하(갈망)를 빼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여쭈었습니다.


 비얌마 천인들은 오백 개의 지구가 생겼다 사라지는 시간만큼 수명이 아주 길답니다. 이렇게 수명이 긴 천인이 깜마욕계에 사는 중생들이 갖은 오욕락에 집착하고 그걸로 인해 너무나 자주 태어나고 죽는 걸 보니까 불쌍해서 비얌마 천인들처럼 오래 살면 좋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부처님한테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가만히 보면 비얌마 천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얌마 천인은 오래오래 사는 것이 생노병사를 계속 받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오래 살려면 깜마오욕락에 탐착하지 말고 선정수행을 익혀야 하고 또 그것이 비얌마 천인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서 이런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질문을 여러분들한테 드린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하면 먹고 입고 마시고 가족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생활을 들여다보면 의식주를 위해서 하루 종일을 허비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한 가정을 거느리는 사람이라면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자기 가족이 먹고 입고 마시고 생활하기 위한 물질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천인이 부처님께 이러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니까 부처님께서 그것에 옳다고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이 “그래, 네 말이 옳다.” 이런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부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천인이 든 비유방법은 좋지만 비유내용은 허락을 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나’라고 그릇 생각하는 그 사까야 디티(유아견)을 빼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머리에 불이 타는 사람이 불을 끄는 것이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는 그 사견을 빼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얌마 천인은 “깜마오욕락에 탐착하는 딴하(갈망)를 빼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라고 부처님께 말씀드리니까 부처님께서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는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수행하시는 여러분들은 어떤 편에 서시겠습니까? 비얌마 천인이 말하는 깜마오욕락에 탐착하는 딴하(갈망)를 빼어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악연을 떼어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를 여러분들에게 묻는다면 비얌마 천인의 의견에 동조하겠습니까? 아니면 부처님 말씀을 따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깜마오욕락에 집착하는 딴하(갈망)를 빼어버리는 것 역시 쉽지 않고 어려운 일입니다. 왜그러냐 하면 이 세상 자체가 깜마욕계 세상이기 때문에 깜마오욕락을 떼어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자체가 오욕락으로 인해서 태어난 중생들이니까 오욕락 역시 빼어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대상 또한 다섯 가지 즐거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니까 여기에 살면서 욕계중생의 몸을 받으면서 오욕락을 빼어버리기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깜마오욕락을 빼어버리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마타 선정을 수행하는 방법, 또 두 번째는 아나가미(불환과), 즉 세 번째 도과를 성취하면 욕계 오욕락에 대해서 완전하게 생각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사마타 선정은 얻기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마타 선정만으로 오욕을 빼어버리기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정으로 빼어버리는 것은 임시로 빼어버릴 수가 있지 영원하게 빼어버리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얌마 천인의 몸을 받아서 비얌마 천상에 사는 동안은 오욕락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비얌마 천인의 과보가 끝나고 그 다음에 떨어지면 그곳의 과보, 오욕락을 다시 원하고 받게 되어 있습니다. 비얌마천이 우리로 말하면 색계천인데 비얌마천에 살면서 비얌마천의 수명이 다 되어서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면 다시 욕계니까 오욕락에 탐착하게 돼있습니다. 인간 욕계에 태어나서 욕계 깜마 오욕락에 탐착해서 불선업을 짖게 되면 다시 4악처(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라는 곳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마타 선정으로 오욕락을 빼어버리는 것은 그렇게 마음 놓고 만족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악처의 문을 완전하게 닫을 수 있는 수행방법, 우리가 안심하고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설하셨습니다. 여기서 몸과 마음을 ‘나’라고 집착하는 사까야 디티, 잘못된 견해를 여러분에게 잠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까야 디티는 ‘사까’와 ‘디티’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사까야’는 ‘현재 있는 몸과 마음’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몸을 사람이다, 너다, 나다, 남자다, 여자다, 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을 ‘사까야 디티’ 이렇게 부릅니다. 사까야 디티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않는 일반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생길 수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 6근으로 항상 사까야 디티라는 사견이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아서 그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릴 때, 이렇게 안근으로 보아서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작용이 이루어진 것을 보지 않으면 사까야 디티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세 가지 작용이 이루어져서 보게 되는 상황을 가지고 ‘내가 본다’, 아니면 ‘사람을 본다’, ‘남자를 본다’ 이런 식으로 하면 사견에 가까이 가게 됩니다. 눈과 보이는 대상은 물질에 해당이 되고 그것을 보아서 아는 것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렇게 물질과 마음이 합쳐서 보는 일이 완성이 됩니다. 이렇게 물질과 보는 마음, 아는 마음의 작용으로 대상을 보아서 안다는 것이 성립이 되는데 그렇게 있는 대로 보지 않고 ‘내가 본다’거나 ‘남자를 본다’, ‘여자를 본다’, ‘좋은 것을 본다’, ‘나쁜 것을 본다’ 하게 되면 사견에 가까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봤을 때 내가 본다고 하면 사까야 디티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보게 되는 ‘나’라는 것에 사까야 디티(유아견), 딴하(갈망), 마나(교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보는 대상에 탐착하면 갈망이 생기게 됩니다. 보는 대상을 자기 소유로 하고 싶어 하는 것 역시 딴하(갈망)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보이는 대상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을 때 마나(교만)가 생기게 됩니다. ‘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게 됐다고 하는 교만심이 거기에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갈망하고 교만심 내는 것이 어디에 뿌리가 되느냐, ‘나’라고 집착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는 사까야 디티가 성립되었을 때 모든 불선업이 거기서 비롯됩니다. 몸과 마음을 ‘나’라고 집착했을 때 ‘나’를 위해서 모든 불선업이 벌어지게 되고 그 불선업을 짓게 되면 고통을 당연히 받게 되고 금생 뿐만 아니라 내생까지 그 불선업의 결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4악처에 이르게까지 할 수 있는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를 가지고 있는 6근으로서 그것을 관찰하지 않으면 그대로 악연이 들어오게 되는 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들어오는 악연 사까야 디티를 무엇으로 빼어버리느냐,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사띠빠타나 위빠싸나 수행으로 빼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여기서 수행하고 있는 이 순간이 사까야 디티 악연을 빼어버리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호흡을 들이마셔서 배가 불러졌을 때 ‘일어남’ 하고 관찰하는 것은 일어나는 몸, 물질을 관찰하는 중입니다. 이 물질이 몸이라는 것은 현재 분명하게 있는 작용입니다. 움직이는 작용, 불러지는 작용, 단단해지는 작용, 이것을 관찰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순간순간 여러분들이 물질의 작용을 관찰하는 마음의 작용을 순간, 순간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현재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오른발’, ‘왼발’ 하고 관찰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까야 디티에 집착하는 걸 빼어버리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사까야 디띠를 빼어버리는 것이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정확하고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보면 보시를 하는 것이 좋다, 계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설해놓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나(보시)를 하는 것도 선업에 해당이 됩니다. 계를 잘 지키는 것 역시 선업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지만 다나(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4악처를 완전하게 끊어낸다고 만족하지는 마십시오. 계를 잘 지키고 계를 청정하게 지니는 것 역시 선업에 해당되고 좋은 입입니다. 그렇지만 4악처를 완전히 빼어버린다고 만족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말씀드린 것이 게송에 있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으로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빨리어 경전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숫따니빠따에 있는 빨리어 게송입니다.


‘나’라는 마음을 없애지 않은 채 보시 공양하는 것만으로써 4악처를 벗어난다고 만족하게 지내지 말라.

‘나’라는 교만을 없애지 않은 채 계를 지킨다는 것만으로써 4악처를 벗어난다고 만족하게 지내지 말라.

경전이나 학문을 익히는 것만으로써 그리고 깊은 숲 속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것만으로써 4악처를 끝낸다고 만족하게 여기지 말라.

선정을 익히는 것만으로써 만족해서 4악처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만족하게 지내지 말라.

고요한 적정 처에 가만히 있는 것으로써 4악처를 벗어난다고 만족하게 여기지 말라.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에 ‘나’라고 집착하지 말고 몸과 마음의 작용인 것을 분명하게 알아내는 것이고 그것이 4악처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기서 명칭과 실제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남자’, ‘여자’, ‘중생’, ‘사람’ 이런 식으로 명칭이 있지 않느냐?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명칭으로 할 때는 ‘사람’, ‘남자’, ‘여자’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서로 교제를 할 때 훨씬 쉬워지니까 이렇게 명칭을 붙이기는 합니다. 이것을 개념적 진리라 하며, 이것 역시 빨리어로 하면 ‘따목띠삿짜’로 명칭이 있습니다. 다른 이의 생명을 죽여도 안 되고, 훔쳐도 안 되고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에 들어가서 빠라마타 방법으로서는 ‘남자’ ‘여자’ 이런 구별이 없습니다. 그 실제에 훨씬 가까이 들어가면 몸과 마음, 물질과 비물질 이런 것만 있습니다. 이 실제를 가지고 명칭으로써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아비담마 방법으로 말하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지수화풍 이런 부분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제방법, 성품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세상에서는 명칭으로써 그것을 비유하거나 견주면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자면 만약에 세상에서 남자 여자 두 부류가 사는데 남편이 “여보, 시장 가서 고기 한 근 사서 우리 요리를 좀 만들어 먹읍시다.” 이런 것을 빠라마타 방법으로 말하면 남자도 지수화풍, 여자도 지수화풍 그리고 고기도 지수화풍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분이 지수화풍이 지수화풍 보고 지수화풍 사와라 이런 식으로 말하면 말이 도저히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 이것을 이야기할 때는 실제방법, 아비담마 방법으로 이야기 한다 이렇게 해야 말이 성립이 됩니다. 만약에 이것을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데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하고 시비가 생겼거나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여보게 ‘몸과 마음’, 저 ‘몸과 마음’ 보고 뭐라고 하게.” 하고 이야기를 하면 도저히 일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몸과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차려서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을 몸과 마음을 구분해서 아는 지혜(나마 루빠 빠리쩨다냐냐)가 여기서 성립이 됩니다. 이것은 몸과 마음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알아차리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수행자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 일어남 할 때 일어나는 물질의 작용, 일어남을 아는 마음의 작용, 사라짐 할 때 배가 꺼지는 것은 물질의 작용 사라짐을 안 것은 마음의 작용, 앉음 할 때 역시 앉아있는 것은 물질인 몸, 앉음을 아는 것은 여러분들 마음의 작용, 오른발 왼발 할 때 오른발하고 발이 나가는 발의 작용은 물질, 발의 작용을 오른발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의 작용, 이렇게 몸과 마음의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자들이 해야 될 가장 기초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은 여러분들 6근으로 드러나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있는 대로, 현재 진행되는 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위빠싸나 사띠빠타나 수행의 가장 기초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수행하는 순간 ‘보임’, ‘보임’ 하고 관찰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아, 내가 남자를 보고 있구나!’, ‘여자를 보고 있구나!’ 하면 거기에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구분까지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까야 디티’(유아견)에 떨어지는 일이 됩니다. 몸으로 어떤 대상을 볼 때 ‘보임’, ‘보임’ 하고 관찰하지 않으면 거기에 내가 본다는 사견이 들어가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들이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보임’, ‘보임’ 하고 관찰하면 보고 난 다음에 좋은 것을 보았다, 나쁜 것을 보았다 해서 불선업으로 연결되지 않고 보는 자체로써 끝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몸과 마음을 정확하게 아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몸으로 닿고 부딪치고 촉감을 느낄 때 역시 ‘들림’ ‘들림’ 아니면 ‘냄새’ ‘냄새’, ‘닿음’ ‘닿음’ 이렇게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그 순간 자체에 정확하게 알아차려야만 사까야 디티라는 탐심, 갈망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앞에서 설명 비유한 대로 말하자면 사까야 디티라는 화살, 사까야 디티라는 불덩어리를 빼어버리는 작업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관찰을 멈추는 순간에 사까야 디티라는 악연의 불이 여러분들에게 붙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사까야 디티라는 불을 미얀마의 유명한 레디 사야도께서 4악처의 불, 지옥의 불이라고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 사까야 디티라는 사견, 아주 중요한 사견을 빼어버리는 수행 아니면 4악처의 불을 주면 잠재우고 4악처의 불을 끄는 수행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을 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여러분 가슴에 실제 화살이 꽂혀있는데 그 화살을 뽑아내는 것보다는 4악처에 떨어지게 하는 사까야 디티를 떼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 한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열두 분의 스님들이 부처님한테 수행하는 방법을 잘 배워 가지고 숲으로 들어가서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열두 분 중의 한 분이 여러분들이 하시는 것처럼 경행을 천천히 하고 있다가 사띠를 놓치는 바람에 미끄러졌습니다. 그런데 그냥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는 순간에 가시가 발바닥에서 시작해서 발등까지 찔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들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발바닥에서 가시가 들어가서 발등까지 뚫어졌을 때 얼마나 피가 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이렇게 발바닥에서부터 발등까지 가시가 찔려있어서 이 스님이 가시를 뽑으려고 하다가 잠깐 멈춰서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내 발바닥에 박혀있는 이 가시를 뽑아내는 것이 중요하냐,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는 저 무시겁부터 내가 지금까지 윤회를 받아온 이 사견을 빼어버리는 것이 더 중요한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상을 한번 해보세요. 내 발바닥에 찔려있는 가시를 빼내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지독하게 4악처를 돌고 도는 윤회를 밟게 하는 사까야 디티를 빼는 것이 중요한가 여러분 자신에게 견주어서 한번 생각 판단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을 먼저 뽑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시는지요?


 사까야 디티를 먼저 빼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맞지만 실제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냥 있는 대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더 확실할 것입니다. 보통 우리 일반 사람들이라면 이것저것 다 제치고 주저앉아서 가시를 뽑아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나 또한 앞에 있는 우리들이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선 가시를 뽑는 게 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욕계 중생들의 심성이겠죠.


 그런데 가시가 박힌 이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냐하면 뽑으려고 하다가 잠깐 멈춰서 생각하기를 ‘발바닥에 꽂혀있는 이 가시는 나를 4악처에 떨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사까야 디티, ‘나’라는 견해, 사견 그런 것을 빼어버리지 않으면 나는 또 어느 순간에 ‘나’라는 생각, 내 것에 대한 집착으로 불선업을 지어서 틀림없이 악처에 또 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스님은 더 중요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발바닥의 가시는 그냥 둔 채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리는 수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리는 방법은 여러분들도 아시죠. 신수심법 네 가지 방법으로 수행하는 사띠빠타나 방법, 그러니까 발바닥의 가시를 빼어버리지 않고 이 네 가지 방법으로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리는 수행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사까야 디티라는 가시를 빼어버리기 위해서 사띠빠타나 네 가지 방법으로 밤새 뽑기 시작하셨습니다. 밤새도록 수행을 하셔서 아침 날이 밝아졌을 때 이 분이 완전히 가시를 뽑아버리게 되었습니다. 큰 가시를 다 빼어버린 다음에 옆에 수행하는 스님한테 가서 “스님 내 발바닥의 가시 좀 빼어주십시오.” 해서 그것을 보니까 시간이 오래됐거든요. 피가 너무 엉기고 굳었고 해서 “스님, 이 가시가 언제부터 찔려있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어제 초저녁쯤 이 가시가 박혔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미련한 스님아, 어제 저녁에 찔렸으면 어제 저녁에 뽑아내야지 왜 여태까지 뒀느냐.”하니까 이 스님이 대답하기를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시를 빼어버렸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옆에 있던 스님들이 “그러면 그 사까야 디티라는 가시를 다 빼어버렸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스님이 “나는 다 뽑아버렸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사까야 디티라는 사견을 빼어버렸다고 대답하는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소따빠나막가(수다원) 팔라(果)를 얻은 상태를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현재 이 세상에 사는데 의식주가 물론 중요합니다. 먹는 일, 나라 일, 여러 가지 경제 일이 중요하지만 우리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를 4악처에 떨어지게 하고 우리를 불선업으로 이끌어가게 하는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중요한 일을 많이 해야 되지만 여기 와서 수행하시는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우리 6근으로 들어오는 모든 일에서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자기의 몸과 마음의 작용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관찰하다보면 몸의 작용, 마음의 작용, 몸과 마음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기면 일어나는 몸이 원인이 돼서 사라지는 결과가 생기고, 일어나는 것을 원인으로 해서 관찰하는 결과가 생기고, 원인-결과를 알아차리는 지혜, 빠짜야-빠리가하-냐냐가 또한 생겨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앉아있는 것은 앉아있는 몸의 차례 차례가 아주 빠른 순간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앉아있는 자세가 이루어집니다. 앉으려는 마음의 진행이 차례 차례로 돼서 몸의 진행차례가 또한 연결돼서 현재상황이 진행됩니다. 걸으려는 마음으로 인해서 걷는 동작이 생겨납니다. 걸으려는 마음의 원인으로 해서 걷는 몸의 결과가 생기고 이렇게 원인 결과가 맞물려서 돌아갑니다. 걸으려는 마음의 원인으로 해서 걷는 몸의 작용이 나오고 걷는 몸의 작용을 원인으로 해서 걷는 것을 관찰하는 마음의 결과작용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원인 결과로 인해서 현재 몸과 마음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게 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원인 결과, 원인 결과로 진행된 것이지 어떤 창조주가 만들어서 던져 놓은 것이 아니라는, 그런 창조주에 관한 설이 자기 자신에게서 없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이 몸의 원인으로 해서 마음의 결과가 나타나고 마음의 원인으로 해서 몸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원인-결과에 대한 지혜가 생겨나가 됩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 6근으로 들어오는 모든 일이 원인 결과, 원인 결과의 상황으로써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원인 결과, 원인 결과를 더 관찰하다보면 사마디(집중)와 사띠의 힘이 강해지는 원인 결과, 원인 결과가 한 쌍으로 해서 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을 또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여러분들께서 관찰수행을 하다보면 보는 것과 보는 것을 아는 마음, 듣는 것과 듣는 것을 아는 마음이 관찰하는 순간순간 생겨났다 사라지고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하면 ‘아닛짜’, 우리말로 하면 ‘무상’에 해당이 되죠. 이렇게 일어나는 몸과 마음, 일어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사라짐으로 해서 끝내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 듣는 것, 닿음, 이런 것이 계속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을 만약에 사라지지 않게 하고 계속 모아 놓는다면 얼마나 많아질지 여러분들 상상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겨났다 사라지고 하는 것을 어디에도 머물게 할 수 없고 어디에도 잡아둘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생겨났다 사라지고, 생겨났다 사라지듯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것이 모든 중생들을 절대로 즐겁게 할 수 없는 것, 괴롭히는 것, 고통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것 역시 고통입니다. 이것을 고통이라고 안 것은 ‘가짜고통’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빨리로 하면 ‘위빠리나아’입니다. 이건 진짜고통이 아닙니다. 현재 수행자들이 수행하는 순간에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하는 이것이 진짜고통입니다. 이렇게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 나의 원함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의 원함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만들어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원래 성품이 그렇게 생겼다 사라지는 겁니다. 계속해서 생기라고 아니면 그만 생기라고 누구도 명령 내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아낫타’, ‘무아’의 성품이라고 이해하십시오.


 그래서 위빠싸나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상, 고, 무아 이 세 가지 성품입니다. 이렇게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하는 여러분들의 성품을 잘 관찰하여 여러분들의 위빠싸나 지혜가 성숙하게 되면 생멸이 끝나는 자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생멸이 끝나는 자리가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닙바나의 자리입니다. 닙바나를 여러분들이 실제로 체험을 했다면 그때서야 사까야 디티라는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사까야 디티 생멸이 끝나는 상태를 체험해서, 사까와 닙바나를 체험해서 사까야 디티의 불이 사라진 상태를 소따빠나 도과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소따빠나 도과를 얻은 사람은 어느 때도 다시는 4악처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설사 그 사람이 가장 낮은 소따빠나라 해도 7생 이상은 절대로 윤회하지 않는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덟 번째 생은 받지 않습니다. 7생 안에 몸과 마음의 생멸이 완전히 끝난 마하 빠리닙바나를 얻게 됩니다. 생멸을 완전히 끝내는 아라한 도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사까야 디티를 빼어버리는 첫 번째 도과를 얻도록 여러분들이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아라한 도과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축복경에서 과거에 지은 선업 불선업을 완전히 빼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라한 도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에 지었던 불선업도 아라한 도과를 얻게 되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새 업과 묵은 업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다음 생, 더 아름다운 생을 원하는 갈망도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씨앗을 불에 그슬리게 되면 다시는 싹을 틔울 수 없는 것처럼 도과의 불로써 여러분들의 묵은 업, 새 업을 태우게 되면 다시 업을 받게 되는, 다시 생을 받게 되는 그런 기회는 없습니다. 다음 생에는 좀 부자로 살아야지, 다음 생에는 왕으로 살아야지 아니면 나는 다음 생에 천황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에 탐착하는 탐심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탐착, 갈망, 라가를 빼어버린 아라한 이런 분들은 다시는 어떤 생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름접시 불에 불을 켜놨을 때 그 심지하고 기름이 완전히 소진된 것 같이 그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 소멸된 기름접시의 기름하고 심지가 어디에 갔느냐 하는 것이 성립이 안되듯이 아라한 성인의 마음과 몸의 성품이 어디에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 오셔서 법문 듣고 수행하시는 선한이시여! 여러분들께서도 ‘사까야 디티’라는 그 악처에 떨어지는 가시를 완전히 빼어버려서 다음에는 다시 고통을 받지 않고 여러분들 현재 생으로써 닙바나를 체험하시기를 축복 드립니다.


(테이프가 끊김 - 수행자 질문시간)


 소따빠나막가에……가 있습니다. 이고뜨라부(Gotrabhu)란 범부의 위치를 벗어나서 아리야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기 직전의 지혜입니다. 범부라는 위치는 자기마음대로 좋아했다 싫어했다 하는 수준을 범부라고, 부뜨자나라고 부른답니다. 이 고뜨라부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 위치와 안녕하는 자리랍니다. 이 고뜨라부냐냐라는 것이 그렇게 범부의 위치는 안녕했지만 아직 닙바나의 위치까지는 가지 못한 사까야디티를 끊은 자리는 아닙니다. 고뜨라부냐냐 다음 위치가 막가냐냐, 도의 위치입니다. 이것은 범부의 위치가 아닌 아리야 성인의 위치입니다. 아리야 위치가 돼야만 범부의 위치가 아닌 사까야디티를 벗어난 장부입니다.


 이렇게 막가냐냐로 소따빠나 지혜에 이른 사람을 범부가 아닌 성인 아리야 이렇게 부릅니다. 이렇게 소따빠나냐냐 첫 번째 도를 얻게 되면 사견에서 떠나 그 다음에 다른 방법, 이 위빠싸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 외 다른 삿된 수행방법에 절대 이끌려들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견이라고 하는 것은 사까야 디티 이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의심이라는 것은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 부처란 존재가 정말 있을 수 있는, 정말 생사를 뛰어넘는 위치에 있는 그렇게 높은 삼보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첫 번째 범부의 위치를 벗어나서 아리야가 되는 동시에 의심하고 사견하고 잘못된 수행에 대한 세 가지를 그 시점에 벗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소따빠나 위치를 자기 스스로 체험하게 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소따빠나 위치, 의심을 벗어난 장소,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확신하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이런, 이런 가르침을 가르쳐주셨고 부처님 아리야 제자들께서 나처럼 이런 도과를 성취한 것이 정말로 맞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수행자: 소따빠나 종류가 몇 가지가 됩니까?


스님: 크게 나누면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종류가 있는데, 제일 낮은 소따빠나는 7생까지 윤회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 같은 소따빠나이지만 지혜가 더 열린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은 한생만 더 받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종류는 두 번 더 받고, 세 번 더 받고 네 번 더 받고 다섯 번 더 받고 그 다음에 한 번 더 받는 그런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눠지느냐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겠죠. 아리야 성인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생에 태어 날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새가 자기가 원하는 나뭇가지 위나 아래에 앉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범부는 만약에 야자나무 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자기가 떨어지고 싶으면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좋은 곳이거나 나쁜 곳이거나 떨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는 탐심을 끝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음 생에는 아주 멋지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하거나 천상에 가서 한번 살아봐야지 하는 탐심이 있게 되면 그런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더 얻고 싶어도 7생 이상은 더 이상 얻지 않습니다. 지금 수행하는 여러분들은 좀 잘 살았으면, 좀 예쁘게 태어났으면, 아니면 천상의 거대한 낙을 누려봤으면 하는 생각이 조금 있습니까?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현재 살고 있는 욕계의 세상에서 마음 행복하고 편안한 것을 많이 만나게 됩니까? 아니면 고통스럽고 불편한 것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까? 자기 자신이 한번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스님들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행복한 순간보다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느낌, 아니면 마음속에 들어오는 불편한 생각 이런 것을 잘 관찰함으로써, 이것을 수행으로써 이겨나가면 세상에 아무리 많은 고통이 오더라도 그것보다도 훨씬 더 심한 고통도 여러분들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그런 노력으로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법을 펼 때 이런 수행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수행자가 수행 좀 하겠다고 하니까 남편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원해도 허락을 하지 않았는데 그때 이 여자 수행자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죽기 전에 꼭 수행을 해야 되겠다는 각오로 수행 장소로 갔습니다. 그래서 한 보름 동안 수행을 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화가 난 남편이 자기의 옷을 보는 앞에서 다 칼로 잘라 놨습니다. 그런데 그전 같으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굉장히 화가 나고 이 남편에 대해서 원한심이 생겼을텐데 ‘보임’, ‘보임’ 하다 보니까 화가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이 여자 수행자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냐하면 “아, 나한테 이렇게 몸과 마음이 진행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만나는 구나. 나에게 정말로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허물을 보기 전에 “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내 상황이 내가 나에게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진행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만나는 것이구나.” 하고 아까 말한 빠라마타(실제)에 들어가서 관찰을 하니까 상대방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는 분도 있고 못하시는 분도 있는데 자기의 몸과 마음을 애착하지 않으면, 탐착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닙바나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리야 성인들, 아라한들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닙바나를 얻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을 미워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자: 윤회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스님: 그렇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결과 법을 설명하면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12연기법을 설명하면 시간이 길어지니까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여러분들이 아침에 눈을 뜨면 숨을 쉬어야 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되고 어떤 생각이 들어오면 생각을 해야 되고 이러한 상황을 여러분들이 한번만 하고 맙니까? 아니면 날마다 계속합니까? 여러분들이 꼭 안 보이는 것 만 윤회라고 생각하시지 말고 아침에 일어나고 보고 듣고 배고프면 먹고 또 힘들면 눕고 먹고 자고 보고 듣고 이것을 윤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좋아합니까? 미워합니까? 가족과 일가친척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 만날 때 마다 “미워, 미워.” 합니까? 아니면 속으로 “아이구! 내 남편, 내 자식, 내 집, 내 차.” 이렇게 집착합니까? 안합니까? “다시는 내 차 안 봤으면.”, “다시는 내 남편 안 봤으면.”, “다시는 내 자식 꼴도 안 봤으면.” 그렇게 합니까? 아니면 집착합니까? 그렇게 미워하지 않고 집착하는 것이 윤회하는 원인이고 윤회의 계속입니다.


 제가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한참 경전을 배울 때 일입니다. 그 만달레이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스님들이 하루 한 끼만 드십니다. 아침에 선원 청소를 하고 발우를 들고 걸식을 갔다 오면 하루에 두 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곱 집, 여덟 집정도 다니다보면 그날 먹을 음식을 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니다가 마지막 집을 가기 전쯤 되면 시장이 극도로 심해져서 아주 힘이 들고 글을 많이 읽은 날은 손가락이나 몸이 떨릴 만큼 시장기가 심해집니다. 그럴 때 내가 왜 이렇게 심하게 시장기를 겪어야 되냐 라고 원인을 찾았을 때 배가 있기 때문에 그런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배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구나 라고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아는 것이 현재 상황을 알아차리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배가 있음으로 해서 매일매일 배가 고파야 되고, 이렇게 발우를 들고 매일매일 탁발을 해야 되는구나. 이 배가 없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집에 도착했을 때 그 집 부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보세요, 내가 이렇게 발우를 들고 매일매일 여기에 와서 공양을 받고 두 분을 만나고 저 옆에 있는 강아지도 만나고 하는 늘 이렇게 배고픈 시간에 만나는 이러한 것이 나한테는 정말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두 분도 매일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 얼굴 만나고 똑같은 아내, 똑같은 남편, 옆에 있는 강아지, 또 아침에 일어나면 밥해야 되고 또 아침이 되면 스님들한테 공양을 올려야 되고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싫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이 대답을 자기가 하지 않고 남편에게 미루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스님, 매일 공양이 모자랍니까? 아니면 경전 배울 책이 모자랍니까? 공책이 필요합니까? 혹시 볼펜이라도 필요합니까? 뭐가 필요합니까?”라고 물어보고 그 부인은 자기가 뭘 잘못했나, 반찬을 잘못 드렸나 싶어서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혹시 성질 사나운 부인, 남편 같으면 몽둥이 들고 따라와서 내가 도망가느라고 힘들 텐데 자기들이 스님을 잘못 보호해서 스님이 이런 생각을 하시는가 하고 미안해하는 착한 부인, 남편을 만나서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윤회라는 것은 꼭 길게 한 생, 두 생, 십 생, 스무 생 이렇게 멀리 안 봐도 오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먹고 사람들 만나야 되고 내일도 만나고 이야기하고 매일매일 6근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것을 윤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현재 여기 와서 몸과 마음의 진행되는 상황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여러분 집에서 매일 만나는 부엌, 솥, 아들, 딸, 이 윤회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벗어난 순간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여기 와서 수행을 할 때 자기 몸에도 딱 붙여서 집착하지 말고 자기 마음에도 내 마음이라고 붙들고 괴로워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떼어내는 작업, 설사 미워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붙들고 거기에서 힘들어하지 말고 떼어내는 작업이 윤회를 끊어내는 작업에 해당이 됩니다. 삼사라(윤회)라는 것은 이 정도로 설명하고 이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이 중요하겠지요.


수행자: 항상 관찰을 하다보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밖에는 없다는 것이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그걸 빨리 알아차리면 좋겠는데 자꾸 놓쳐버리고 이미 한 단계 넘어서서 알게 됩니다. 그걸 어떻게 하면 순간, 순간 놓치지 않고 잘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제가 지금 화가 났으면 화가 났구나하고 금방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걸 알아차릴 때도 있지만 못 알아차릴 때가 더 많다는 얘기입니다. 그걸 어떻게 하면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면서 할 수 있을까 이게 고민스럽습니다.


스님: 앉아서 수행 할 때 부처님한테 삼배를 하지요. 삼배를 하면서 그냥 습관적으로 하지 말고 부처님한테 지극하게 삼배를 하면서 ‘이 1시간 동안은 제가 될 수 있으면 망상 좀 덜하고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에 더 밀착해서 관찰할 수 있느냐.’ 라고 매 순간순간 마음을 다 잡아서 화살을 한번 쏘더라도 정확하게 과녁을 맞추도록 하는 작정과 결심과 서원을 하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이 물론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설사 법에 대해서 생각을 하더라도 앉아서 관찰 할 때는 관찰 하는 것이 수행의 정확한 방법이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는 정확하게 관찰하는 훈련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지 이것은 저럴까 저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을 계속하는 것을 자기가 허락해서 생각하기를 좋아하면 수행에는 방해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집에 있을 때 손님이 오지요. 손님이 왔을 때 손님한테 지극한 정성으로 커피도 드시라고 하고 떡도 드시라고 하고, 어서 오세요 하면서 이야기도 부드럽게 하고 재미있게 하면 그 손님 안 돌아가지요?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실 때 그렇게 생각하는 손님을 환영해 가지고 아버지 생각, 딸 생각, 집 생각, 차 생각하면서 자꾸 좋아하고 환영하면 절대로 안 갑니다. 오자마자 대문에서 한방에 끝내서 쫓아내세요. 그런데 실제 여러분 집에 손님이 올 때 제가 가르친 방법은 사용하지 말고 마음속에 찾아오는 이런 손님들은 아주 단 칼에 쫓아내세요. 여러분들이 어떤 대상을 좋아할 때 그것이 생명 있는 존재라면 그 존재가 굉장히 불결하다는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 굉장히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아니면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 그러면 그 좋아하는 생각이 있는 날은 그 남자나 여자 생각이 도저히 마음에서 안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좋은 부분에 계속해서 집착해서 연결시키지 말고 좋다고 생각되는 부분의 실체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부정관이 꼭 시체만 보는 게 부정관이 아니고 그렇게 집착할만한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부분으로 마음을 돌리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앉아서 관찰할 때 일어남할 때는 마음이 거기에 정확하게 붙어서 ‘일어남’, ‘사라짐’ 할 때는 마음이 사라지는 그 상황에 정확하게 붙어서 ‘사라짐’, 들릴 때는 정확하게 그 들리는 순간, 한참 지나 보내고 ‘들림’, ‘들렸던가’하면 이건 위빠싸나가 아니지요. 그 정확한 순간, 순간 이가 딱딱 맞게 보임, 일어남, 사라짐, 들림, 미워함, 좋아함하고 정확하게 그 현재 상황에 이가 맞물려 들어가면 절대로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길어져 이만하고 다음 기회에 또 만나겠습니다. 몸과 마음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200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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